선정(禪定)은 고요한 곳에도 있지 않고, 또 시끄러운 곳에도 있지 않으며, 날마다 관련을 맺는 일에도 있지 않고,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에도 있지 않다. 그러나 먼저 고요한 곳이나 시끄러운 곳이나 날마다 관련을 맺는 일이나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을 버리고 참구하지도 말아야 한다. 만일 갑자기 눈이 열리면 비로소 그것이 집안일임을 알 것이다."

실로 진리는 평범한 일 속에 감춰져 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주변에 언제든지 상존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 마음의 눈이 열려 발견하고 들어내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갑자기 그것은 그것을 찾는 이에게 법열로서 다가온다. 석가는 명성을 보고 깨달음을 성취했고, 영운은 복숭아 꽃을 보고 진리를 깨달았으며, 향엄은 대(竹) 치는 소리를 듣고 개오했다고 한다. 또 그리고 만해는 어느 찬바람 휘몰아치는 겨울밤,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오도를 이뤘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의 깨달음이 갑자기, 그리고 우연히 이뤄진 것은 아니다. 석가는 출가 후 6년간의 피나는 고행을 했고, 영운이나 향엄, 만해 역시 오로지 이 순간을 위해 오랜 동안의 각고의 수련을 쌓았다. 그 결과로서 깨달음을 이룬 것이다. 그런데 명성이나 도화, 격죽성 등은 다만 그 계기가 됐을 뿐, 그 깨달음의 당체는 다름 아닌 마음이다. 즉, 그들이 닦아온 것도 마음이요, 깨달음의 계기가 된 대상을 보고들은 것도 마음이며, 깨달음에 주체 그 자체도 마음인 것이다. 사실 선이란 것도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으로서 마음을 닦는 정신수양의 대명사일 뿐이다. 깨달음을 최고의 이상으로 하는 불교를 심교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의 자아는 육체와 정신으로 이뤄져 있다. 그런데 이 육체와 정신을 통괄 주재하는 것이 곧 마음이다, 그리고 이 마음의 작용에 의해 깨달음을 이루는 것이니 일체만법이 유심소조인지라 마음을 깨치지 못하면 곧 일체만법을 알 수 없으므로 마음의 수양이 곧 선의 요체이다.

법구경은 마음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마음은 모든 일의 근본이 된다, 마음이 주인이 돼 모든 일을 시키나니 마음 속에 악한 일을 생각하면 그 말과 행동도 또한 그러하리라. 그 때문에 괴로움은 그를 따르리. 마치 수레를 따르는 수레바퀴 자취처럼. 또 채근담에는 이런 말이 있다. 마음 바탕이 밝으면 어두운 방 안에도 푸른 하늘이 있고, 생각 머리가 어두우면 백일 아래도 도깨비가 나타난다. 모두 마음의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는 명언들이다.

고인은 마음을 물과 거울에 비유했다. 거울은 본래 맑고 깨끗한 것이다. 맑은 물에는 만상이 비치고, 깨끗한 거울에는 온갖 사물이 투영된다. 그러나 물 속에 흙탕물이 일고, 거울에 때가 끼면 아무 것도 비치지도 투영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물과 거울의 맑고 깨끗한 본성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항상 물이 맑도록 정화하고 꾸준히 거울을 덮은 때를 닦아 그 본래의 맑고 깨끗함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선이다.

선외선이란 말이 있다. 이는 선과 아무 관계가 없는 평범한 인물로서도 능히 선인과 다름없는 선적인 언동을 하는 경우를 말한다. 비록 불문에 귀의했거나 특별히 선에 대한 관심을 갖지 않았다 하더라도 깊이 있는 사색과 사려깊은 언행을 구사하는 이를 우리는 흔히 본다. 그리고 선이 참된 자아의 발견을 위한 마음의 수양에 있는 것이라면 선 참된 자아의 발견을 위한 마음의 수양에 있는 것이라면 선이 반드시 선인들만의 것일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

사람은 그가 영위하는 삶에 대해 항상 깊이 있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주와 자연, 사회와 인간, 삶과 죽음에 대해 근원적인 의문과 그 의문을 풀기 위한 정신적인 노력을 끊임없이 경주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성현과 철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훌륭한 종교의 가르침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이에 못지 않게 스스로의 반성과 참회를 통한 마음의 수양에 힘써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만 살기 위해 사는 동물적 삶을 뛰어넘어 자기가 스스로의 삶을 가치있게 창조하고 이끌 수 있는 참된 자아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심지어 아는 것이 많은 지식인들까지도 살기 위해 살아가는 평범한 삶 속에 묻혀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평생을 보내는 경우가 적지 않다.

깊은 밤 세속적인 망념을 떨치고 조용히 일어나 깊은 상념에 잠겨보라. 그 절대의 고독 속에 나 혼자 나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값진 일인가. 그리고 거기에서 수많은 세속의 때를 묻힌 채, 한없는 시행착오와 후회를 되풀이하면서 목적 없이 허황된 방황을 계속하고 있는 자기를 발견하라. 그리고 아직도 늦지는 않았다. 그 순간부터라도 본래의 나를 찾아 살아지는 삶이 아니라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라. 생각하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선외선이다. 석준 스님 대전불교사암연합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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