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선거에서 나타난 가장 심각한 고질병은 영·호남 지역주의다. 그런데 이번 19대 대통령선거에서 지역주의에 기초한 몰표 현상이 크게 완화되었다는 긍정적 평가들이 나온다. 특정 후보에게 표가 몰리지 않았다는 것을 그 근거로 들면서. 하지만 이는 잘못된 착시다. 투표 결과의 심층을 들여다보면 지역주의가 전혀 완화되지 않았다. 오히려 악화되었다. 이 불편한 진실을 직시하는 게 정치 개혁을 위한 출발이다.

물론 특정인에게 표가 몰리지는 않았다. 호남 지역에서 최다득표자인 문재인 후보는 광주·전남·전북에서 각각 61.1%, 59.9%, 64.8%를 얻었고, 영남 지역에서 홍준표 후보는 대구·경북·경남에서 각각 45.4%, 48.6%, 37.2%로 최다득표를 했지만, 부산·울산에선 32.0%, 27.5%로 2위 득표에 그쳤다. 영남 지역에서 몰표 현상이 완화되어가는 추세는 분명하지만 호남 지역은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18대 대선 득표비율과 비교해 보자. 당시 문재인 후보는 광주·전남·전북에서 91.97%, 89.28%, 86.25%의 몰표를 얻었다. 반면에 박근혜 후보는 7.76%, 10.0%, 13.22%를 얻는데 그쳤다. 이번 대선 결과와 비교해 볼 때 특정인의 최다득표율이 90%대에서 60%대로 떨어졌으니 몰표 현상이 완화된 것으로 보는 것도 자연스럽다. 특히 2위 득표자가 10-30%까지 득표한 것을 보면.

그러나 이 표면적 결과를 지역주의 완화로 확대 해석하는 것은 분명한 오류다. 18대 대선은 보수와 진보 후보의 양자 대결 구도였고, 이번은 보수와 진보 정당의 분열로 다자 구도로 치러졌기 때문이다. 큰 틀에서 볼 때 영·호남이 지역주의 표심의 시험대라는 현실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보수와 진보 성향 정당후보자 전체의 득표를 비교해 보라. 문재인·안철수·심상정 후보가 총득표한 비율은 광주·전남·전북에서 95.8%, 94.6%, 93.5%에 이른다. 반면에 홍준표·유승민 후보의 합산 득표율은 3.8%, 4.6%, 5.9%로 왜소해졌다. 그렇다면 최소한 호남 지역의 19대 대선 결과는 18대 대선에 비해 지역주의 몰표 현상이 오히려 심화된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물론 탄핵사태를 불러온 박근혜 정부 심판과 정권교체의 열망이 투영된 결과일 터다.

이제 지역주의 투표 행태의 근원적 원인과 처방에 대해 고민해야 할 때다. 기원전 6세기 초 고대 아테네에서도 지역당의 대립을 완화하기 위한 정치개혁이 있었다. 클레이스테네스는 해안당, 평야당, 산악당으로 분열되어 대립하던 정치 지형을 일거에 허무는 대혁신을 주도했다.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는 `아테네 정치제도사`에서 클레이스테네스의 창의적 민주 제도 개혁을 전하고 있다.

클레이스테네스는 귀족의 기득권을 약화시키기 위해 기존의 4개 부족 체제를 교묘하게 해체시켰다. 그 수단은 지역구, 즉 데모이(demoi) 개편이었다. 그는 아테네의 도시·해안·내륙 지역을 각각 10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총 30개의 구역, 즉 트리티스(trittyes)를 만들고, 그 밑에 150-170개의 작은 구역 데모스(demos)를 두었다. 그런 후에 세 지역에서 각각 1개씩 트리티스를 뽑아내 인위적인 10개의 부족, 즉 필라이(phylai)를 만들었다.

이는 혈연적 의미의 부족이 아니라 다른 지역구 사람들을 하나로 묶은 행정적 집단이었다. 이 10개의 부족에서 50명씩 추첨하여 500인 평의회를 만들고, 장군도 뽑고, 민병대도 구성하도록 했다. 자연히 다른 지역 사람들과의 갈등을 줄이고 일체감을 높일 수 있었다. 이로써 데모크라티아(democratia)는 획기적으로 발전했다.

영·호남의 지역주의도 근본적으로 해체할 방법은 없을까. 클레이스테네스의 발상처럼 영·호남을 결합하여 새로운 지역구 개념을 만들어내는 건 불가능한 일일까. 지역주의에 편승하는 양당 패권 정치를 타파하라. 정치권은 정당 제도와 선거구제 개편 등 지역주의를 완화시킬 획기적인 방안을 개헌안으로 내놓기 바란다. 박경귀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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