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진 교수의 시네마 수프] 바흐 이전의 침묵

"직업의 80%가 10년 내 사라지거나 진화", "국내 금융종사자 78%는 4차 산업혁명으로 퇴출 위기", "로봇에게 빼앗기는 인간의 일자리", "2036년 우리 아이의 직업 보고서".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이야기가 넘쳐 납니다. 코앞으로 다가 온 인공지능과 로봇의 활용. 기술의 혁신과 그에 따른 세상의 혁명적 변화. 넘쳐나는 정보와 담론 속에서 미래의 변화에 대한 예측은 희망이 아닌 경고 혹은 경보처럼 보입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그리고 무엇을 위한 혁신과 변화일까요?

조용한 빈 전시공간에 자동 피아노가 들어옵니다. 혼자 움직이는 자동 피아노는 텅 빈 전시실 안에서 골든베르그 변주곡을 연주하며 춤을 춥니다. 영화 `바흐 이전의 침묵`의 첫 장면입니다.

화물 트럭들이 즐비한 고속도로 휴게소 식당에 두 명의 화물 트럭 운전자 들어섭니다.

`하루 종일 운전하고 국경을 넘어 다니다 보면 주변에 온통 망할 차밖에 없다.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한다` 같은 소소한 일상의 대화를 나누는 운전자들은 다시 화물차에 오릅니다. 차는 달리고 조수석에 앉은 다른 기사가 하모니카를 꺼내 불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다큐멘터리처럼 전개되던 영화에 말도 안 되는 바흐의 개입이 있습니다. 기사가 하모니카로 연주하는 곡은 다름 아닌 바흐입니다. 도로 위 스쳐가는 자동차들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텅 빈 고속도로 위로 은은하게 퍼지는 하모니카로 연주되는 바흐. 바흐가 있는 세상과 없는 세상의 차이를 극명히 보여줍니다.

바흐가 생애의 마지막 27년을 지휘자로 일했고, 지금까지 바흐의 무덤이 남아있는 성 토마스 교회, 불면증에 시달리던 카이저링크 백작이 신의 은총을 받은 천재 음악가 바흐에게 변주곡을 의뢰했던 일화가 전해지는 엘바강의 전경 등이 보여지고 나면 지하철 철로를 위를 미끄러지는 화면이 보입니다. 열차가 역사 안으로 진입하면서 무반주첼로 곡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열차 안으로 들어서면 스무 명의 첼리스트들이 있습니다. 달리는 지하철 안에서 스무 대의 첼로가 동시에 무반주 첼로곡을 연주하는 장면을 이 영화의 백미입니다.

바흐가 아들을 가르치며 말하는 "음악의 순수함을 느껴보렴. 무엇에 따라서? 정확하고 엄격힌 질서에 따라. 어떻게 거기에 도달하지? 호흡과 내적인 평안과 주님의 권능으로. 네가 거짓 없는 사람이라면 네 음악 또한 거짓 없고 아름다움으로 충만하단다"라는 대사는, 사후 완전히 잊혀졌던 바흐의 곡들이 100여년 뒤 멘델스존의 하인이 시장에서 고기를 싸 갖고 온 종이가 바로 마태수난곡의 악보였다는 유명한 일화의 소개 뒤로 더 긴 여운을 남깁니다.

앞의 트럭 운전사는 비오는 모텔 방 안에서 홀로 바순을 연주하고 있습니다.

`바흐 이전에도 세계는 있었지만 아무 울림도 없는 텅 빈 공간일 뿐이었다` `바흐가 없었다면 신은 권위를 잃었을 것이다, 바흐가 있기에 세계는 실패작이 아닐 수 있었다`라고 책의 구절들을 인용하던 낡은 책방 주인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음악이 늘 구원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홀로코스트에서 고통 받던 이들에게 음악이 더한 고통을 준 사례를 얘기합니다. 극단의 고통과 절망 그리고 인류의 비극 앞에서 절대적 아름다움이 극대화 시키는 상대적 비참과 처참 그리고 절규에 대해서 말입니다. 피아노는 물에 빠집니다.

다시 4차 산업혁명으로 돌아와 봅니다. 한 설문조사에서 참여자 85% 이상이 4차 산업혁명이 본인의 일자리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대답했고, 구체적인 영향으로 `상당수의 일자리가 소멸할 것`이라는 전망이 가장 높았다고 합니다. 75%의 응답자가 4차 산업혁명이 내 일자리를 위협할 것이라고 대답했고, 이 중 57%가 `가까운 미래에 곧 위협할 것`, 그리고 18%가 `이미 위협하고 있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에 반해 72%가 4차 산업혁명 고도화에 따르는 직업과 경력관리 방안에 대한 대비를 하지 못하고 있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사라질 직업, 살아남을 직업, 새롭게 생겨날 직업", "변화는 예측 되나 대비는 못하고 있다", 결국 이 모든 이야기들의 중심 키워드는 "4차 산업혁명"이 아닌 "생존"입니다.

4차 산업혁명을 바라보는 불확실성과 불안은 변화와 혁신이 가져올 삶의 질의 향상은 가진 자들만을 위한 것일 거라는 생각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누리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더 큰 비참만이 돌아올 것이라는 두려움 말입니다,

`바흐 이전의 침묵`은 그 아름다움과 가치가 그것의 이전과 이후를 나누게 하고, 그 이전을 침묵이라 지칭하게 하는 바흐의 음악, 그리고 그 음악의 세상에의 기여에 대한 영화입니다. 4차 산업혁명 안에도 이와 같은 아름다움이 있기를 바랍니다.

극동대학교 미디어영상제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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