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병배 논설위원
나병배 논설위원
큰 선거에서 이기는 쪽을 선택해온 충청표심은 정평이 나있다. 이번 장미대선에서도 충청 불패신화는 또 다시 입증됐다. 일상의 언어로 표현하면 결과를 예측하는 후각이 기막히다 할 것이다. 흔히 충청 민심을 얻어야 선거 승리를 담보할 수 있다고들 한다. 귀가 간지러워지는 수사(修辭)인 줄 알면서도 듣는 이들은 공연히 우쭐해진다.

앞으로 `이변`이 없는 한 충청의 정치적 태도 균형성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에 무게가 실린다. 양손잡이가 오른 손 왼손을 자유롭게 쓰듯이 그때그때 진영논리를 따지지 않고 될 성 부른 쪽 편을 들어주게 되면 충청지지와 대선승리가 등식이 되는 선거방정식은 깨질 이유가 없어 보인다. 이번 대선 결과를 검산해보면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를 역으로 접근했을 때 다른 관점에서의 추론도 불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해야 하겠다. 먼저 이번 대선을 놓고 보면 충청 유권자들은 특별한 고민이 필요없었는지 모른다. 대체로 5지선다형 선거 형태였지만 실제로는 A·B·C 후보 3명을 놓고 한명을 찍는 3지선다형 선거였기 때문에 마음의 갈등을 길게 끌고 가지 않아도 될 만큼 수월하게 결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하나 지역구도를 업은 후보가 부재한 선거였다는 점이 꼽힌다. 만일 교섭단체를 구성한 정당의 후보 중 충청 연고권자가 있었다면 그를 추수하려는 표심 결집 현상이 두드러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한국의 정치지형 공간은 편의상 영·호남, 충청 등 3개 지역 축으로 구별하는데 그중 충청 축이 배제됨으로 해서 지역 유권자들은 전략적 고민의 짐을 덜고 투표장으로 향했을 것이다.

충청의 선거 지정학적 특성을 임의로 규정하자면 `정치적으로 여전히 착함`이라는 말이 어울릴 듯하다. 정치학적인 논거가 빈약할 수는 있으나 `충청은 정치적 태도에 있어서 착하다`는 사실만은 부정하기 어려워 보인다. 태생이 그러한 면이 있을 수도 있으며, 한편으로는 유한한 정치적 자산을 아껴 써야 하는 현실이 정치적 상상력 따위를 제한하거나 경직시키는 측면을 아울러 생각해 볼 수 있다.

다른 두 지역 축인 영·호남 쪽과 현상적 수준으로 비교해보면 충청의 정치적 입지는 좀 더 뚜렷해진다. 역대 대선 결과를 보면 영남은 소위 87년 헌법 체제 이후 19대 대선에 이르기까지 대통령 권력을 배출해왔다. 유일한 예외가 15대 대선이었다. 물론 보수냐 진보냐 하는 대립은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영남이 독과점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영남에 반동해온 호남 정서의 경우는 결이 다르다는 인식이 전제돼야 한다. 호남도 영남에 비하면 유권자 규모 면에서 상당히 밀려 정치적 마이너리티에 속한다. 그 점은 충청과 부분적으로 겹친다. 다만 호남은 대선 때면 대응방식에 대한 내적인 집단고민을 공유하면서 결속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나아가 이를 정치적 에너지로 변환시켰고 그 결과 이념과 가치가 명료한 지역적 포지션닝을 구축할 수 있었다.

대선 같은 큰 정치 게임에서 목표점을 공략하기 위해 전략적 혹은 전술적 사고의 유연성을 가미함으로써 구도싸움에서 길항(拮抗)력을 강화해온 것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이번 대선 경쟁에서도 목도됐듯이 호남은 연고지 후보를 보유하지 못한 대신 압도적인 표심을 무기 자산으로 삼았다. 게다가 이를테면 FA(자유계약선수)시장에 나온 대선후보 두 명을 확보해 놓고 있었기에 누구를 미느냐 하는 문제는 어쩌면 부차적인 일이었을 수 있다. 구여권 후보에 대해 협공 전술을 구사하는 동시에 전국 득표수 차를 극대화함으로써 대미를 찍은 셈이 됐다.

다른 동네에서 이처럼 묵직한 일이 진행될 때 충청은 캐스팅 보터라는 내재적 논리에만 갇혀 있지 않았나 싶다. 지역 특유의 집단성정이 한 원인일 수도 있겠지만 냉정하게 짚어보면 정치순환 생태계에 역동성이 떨어지는 현실과 일맥 상통한다 할 것이다. 이를 좋게 포장하면 `정치적 착함`이라는 명제가 성립되는 데 이는 유통기간이 지났다고 본다. `정치적 각성` 없이는 주체적 미래에 대한 기약은 희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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