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시절 지리 과목 시험에 단골로 등장하던 단어가 있었다. `높새바람`이었다. 높새바람은 해마다 북동쪽에서 불어오는, 이른바 계절풍이었다. 기억하기로는 봄철의 온난 건조한 바람이었다. 오랫동안 들어보지 못한 말이어서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며칠 전 저녁 티브이 뉴스를 보던 중에 왜 문득 높새바람이 떠올랐을까.

언젠가부터 일기예보에서는 기상 캐스터들이 미세먼지의 농도를 알려준다. 좋음과 나쁨 사이에서 일 년 내내 계속되는 대기의 상황을 보면 삼천리금수강산은 이제 옛말이 된 것 같다. 관심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대기와 자연 현상에 대해 거의 무지한 나는 미세먼지가 발생하는 정확한 원인을 알고 있지 못하다. 중국은 한결 더 심각하다는데 집 근처 산들이 희붐하게 흐려 보이는 날이면 왠지 마음에도 미세먼지가 잔뜩 끼어 있는 듯 찝찝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다.

어제보다 오늘이 더 즐겁고 행복하고 싶은 건 모든 이들의 바람이다. 세상을 살아낸 분량이 어느 정도 되는 이들은 자신의 삶이 바람대로 이루어지기가 얼마나 어려운 노릇인가도 잘 안다. 하지만 삶을 이끌어가는 건 어디까지나 희망이다. 아주 예쁘게 말하면 꿈이다.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당대와의 관계 속에서 꿈을 펼쳐나갈 기회를 가지고 그걸 현실로 이룰 수 있다는 그런 긍정적인 의지 말이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당연하고도 평범한 말이 요즘처럼 절실하게 다가 온 적이 없다. 지상엔 우리보다 잘 사는 나라도 많고 우리보다 못 사는 나라들은 더 많다. 잘 살고 못 산다는 기준 또한 애매하기 그지없건만 유독 우리는 왜 그렇게 온통 경제에만 목숨을 거는 것일까. 마치 경제가 잘 살고 못 사는 것을 구별하는 유일한 기준이라도 되는 것처럼 대통령 출마자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자괴감마저 든다. 잘 사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국민을 행복하게 해 줄 자신이 있다고 핏대를 올리는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온통 경제논리의 잣대를 갖다 들이댄다.

개인적인 견해이지만 나는 경제보다 인문학적인 소양을 가진 이가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겠다. 현재의 불행과 부정과 반목들을 경제논리만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근본적인 원인을 경제논리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우리의 가치관과 내면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하는 대통령이 나오기를 바란다. 경제가 시대 불행의 주요 원인이 된 것은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이를 경제논리로 해결하려는 인문학적 소양이 빈곤한 이가 대통령이 되는 건 더 슬픈 일이다.

상심해 있는 국민에게 말 한마디로 위로를 주고 희망을 주고 감동을 주는 그런 대통령은 당대에는 없는 것인가. 후보자 토론 중계를 보면서 나는 절망한다. 그들의 말을 들으면 미세먼지로 자욱하고 답답한 마음이 더 아뜩해진다. 거리에서는 어깨띠를 두른 이들이 느닷없이 악수를 청해오고 한낮의 해처럼 밝은 얼굴로 웃음 지어 보이지만 토론회에서 보여준 모습과 겹쳐지면서 그들에게서 지성인의 양심과 성자의 평온을 좀처럼 발견하지 못하겠다.

미세먼지의 날들이 계속되어도 선거일은 다가오고 얼마 있지 않으면 누군가는 새 대통령이 되겠지. 세상 돌아가는 노릇과는 무관하게 하루 다르게 푸름을 더해가는 산과 들판을 바라보면 그게 희망이 아니겠느냐고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 이 땅의 대부분의 대중들은 사회적인 위치와 영향력보다 자신의 삶에 온전히 생을 바친다. 나 살아가기에도 급급하다. 어느새 들판을 푸름으로 가득 채운 풀꽃들처럼 그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며 한 세상 무명으로 살다 간다.

5월의 한반도는 어떤 기상도일까.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봄이 왔지만 봄이 아닌 날들이 되지 않기를 소망한다. 무력하기에, 무력해서는 안 된다는 역설을 미세먼지 사라진 현실에서 모든 대중이 확인할 수 있기를 진정으로 바란다. 이태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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