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2년 조선 성종 23년 여름 내내 가뭄이 들었다. 성균관 젊은 유생 이목(李穆)이 상소를 올린다. `정승 윤필상을 솥에 삶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야 비가 내릴 것입니다` 이 상소로 또다시 이목은 할 말은 하는 선비의 표상이 되었다. 어느 날 길에서 우연히 이목과 마주친 예순여섯의 윤필상이 `자네는 이 늙은이의 고기가 그렇게 먹고 싶은가?`라 묻자 이목은 한 마디 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이른바 소인배 앞에서는 장유유서니 정승자리 그리고 예의 따윈 이목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한재(寒齋) 이목(1471-1498). 경기도 김포 출신으로 사림의 종장 김종직의 제자이자 생원시 급제를 거친 전도유망한 유생이었다. 2년 전 성종 21년 임금의 병이 깊어지자 왕대비가 무녀를 시켜 성균관 벽송정에서 기도를 올리게 하였다. 그러자 이목은 유생들을 이끌고 들어가 무녀에게 곤장을 치고서는 내쫓았다. 이를 알게 된 성종이 화를 내며 조사를 명하자 다른 유생들은 모두 달아났지만 이목 혼자 꿋꿋이 자리를 지키니 성종은 도리어 그 기개를 가상하게 여겨 칭찬하고 술을 내렸다. 곧은 선비 이목의 명성은 이로부터 시작된다. 무녀의 치병기도는 음사이자 미신이었지만 정승을 끓인 제사는 선비의 대찬 기상이었다. 그리고 성종의 사림(士林)사랑은 유별난 점이 있었다.

세조 이래의 훈구공신이자 삼정승을 거친 권신 윤필상(尹弼商·1427-1504)을 향한 이목의 공격은 이후 끈질기게 이어진다. 성종에게 불교숭상을 권했다고 하여 이목은 `윤필상은 간귀(奸鬼)이니 주살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대노한 임금이 어찌 나의 정승을 간악한 귀신이라 하느냐 묻자 `윤필상은 욕심이 많고 마음이 흐려 재물을 늘렸고 임금께 아첨하여 불의로 이끄니 바로 간귀`라 하였다. 성종이 `다른 대신들도 같이 참여하고 말했는데 왜 윤필상만 지적하여 죽이라고 하는가?`라며 하옥시키고 공주로 유배를 보내지만 곧 풀어주고 만다. 이목은 이때 공주와의 유배지 인연으로 지역사림의 추앙을 받아 훗날 선조 14년 현 공주시 반포면 공암리 충현서원이 세워지며 배향되니 이는 충남 소재 최초의 서원이 된다.

연산군 1년 이목은 별시 문과에 장원급제, 벼슬길에 들어서나 3년 후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며 신진사림으로 참형을 받게 되니 나이 스물여덟. 당시 사화를 주도하던 윤필상의 의중도 작용했음은 불문가지이다. 죽으며 안색하나 변하지 않고 절명시를 남겼다. `검은 까마귀 모인 곳에 백로야 가지마라` 군자와 소인의 구분은 이렇듯 철저하였다. 그리고 6년 후 1504년 윤필상 역시 갑자사화의 광풍아래 귀양지에서 평시 모습 그대로 의연히 자결한다. `사림들이 그를 비루하게 여겼지만 죄 없이 죽었으니 슬픈 일이다` 사관의 평이다. 성종이 아끼던 두 사람은 아들 연산군에 의해 그렇게 세상을 떴다.

이전에 윤필상이 `이 늙은이의 고기를 그렇게 맛보고 싶은가?`하였을 때 젊은 이목은 왜 그 가상한 기개로 한 바탕 논쟁이라도 하지 않았을까? 왜 성리학의 이치로 당당히 항변하지 않았을까? 훈구대신들의 행태도 문제가 많았지만 사림들의 말과 글도 참으로 험하고 극단이었다. 대화나 설득은 아예 설 자리가 없었고 극단일수록 그 이름은 높아갔고 험할수록 곧은 소리로 간주되었다. 선조 이후 조선은 사림들만의 세상이었지만 이제는 또 그들끼리 군자 소인을 가르고선 험한 말 극단의 말이 지겹도록 되풀이되었다. 분명 공론의 활발함은 있었지만 결국은 화이부동(和而不同)이 아닌 동이불화(同而不和)였다.

2017년 봄 이제 한창 말의 성찬이 벌어지는 정치축제이자 선거의 계절이다. 유창영 대전보건대 방송문화콘텐츠과 교수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