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가 보편화된 현대에도 여러 정체(政體)가 공존한다. 대한민국은 대다수 국가들처럼 민주공화정을 채택하고 있다. 어느 나라이든 자국 정체를 최고의 정체로 믿고 그 정체가 오래도록 존속되길 희망한다.

나라의 정체를 유지시키는 일은 예로부터 통치자들의 공통의 과제였다. 이를 최초로 체계적으로 연구한 이는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이다. 그는 역저 `정치학`(politika)에서 150여 개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다양한 정치체제를 비교 분석하면서 정체를 존속시키는 방법과 정체의 변혁과 파괴를 가져오는 사례를 연구했다.

민주정체를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그러려면 먼저 민주정이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규명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정은 부자든 빈자든 어느 쪽도 우선권을 갖고 다른 쪽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양쪽이 대등한 권력을 갖게 하는 게 요체라고 보았다. 특히 이들이 똑같이 국정에 참여하게 하려면 자유와 평등이 잘 구현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또한 자유 시민을 규율할 최고 권력이 민중이 아닌 법에게 주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결국 민주정을 유지하려면 공유 가치인 자유와 평등, 법치의 이념을 제대로 이해하고 구현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민주정체에서는 정치적 소요와 반목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평등을 추구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더 가진 자들과 평등함에도 불구하고 덜 가졌다고 생각하면 들고일어나고, 불평등, 즉 우월성을 추구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우월함에도 더 갖지 못하고 똑같이 또는 덜 가졌다고 생각하면 들고일어난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소득 양극화를 둘러싸고 빚어지는 갈등과 그 본질은 비슷하다. 아무튼 이런 이기심과 심리적 대립이 민주정을 위협하고 정체의 변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여기에 민중선동가(demagogos)의 무절제한 선동이 가세하면 정체는 심하게 흔들린다.

기원전 5세기에서 4세기에 민주정이 만개했던 고대 아테네에서는 귀족과 민중에게 똑같이 추첨으로 공무담임권을 부여하여 정치적 평등을 보장했다. 그런데 평등의 원리를 경제적 평등으로까지 적용시켜야 한다는 맹신이 민주정을 위태롭게 만들었다. 특히 민중선동가들이 빈자와 부자들을 이분법적 대립으로 몰고 갈 때 그러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중이 너무 가난해져 민주정의 질이 떨어지지 않도록 보살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도 빈자가 부자의 재산을 몰수하거나 적대시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경계했다. 현실적으로 경제적 측면에서는 산술적 평등이 아니라 비례적 평등이 추구될 수밖에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정을 위협하는 일들을 막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민주정체에 맞는 사고와 행동을 하도록 교육을 잘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럼에도 그는 당시 그리스 민주정 국가들에서 민주정체의 진정한 이익에 배치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특히 민중이 민주정체의 특징으로 간주되는 `다수의 지배`와 `개인의 자유`를 잘못 파악하고 그릇된 행동을 하고 있다고 질타했다. 이들이 "정의는 평등이고, 평등은 다수의 결정이 최고 권력을 갖는 것을 의미하며, 자유는 각자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진정한 민주정체는 "각자가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가는 것을 보장하는 체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민주정의 가치 교육 실패가 초래한 결과다.

우리의 고조선 시대에 해당하는 2500여 년 전에 아테네인들은 민주정을 창안했다. 기적 같은 일이다. 그런데 그들의 실험은 위대했지만 실패했다. 민주정의 공유 가치를 제대로 교육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도 민주주의를 향유하려면,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상대적 불평등을 인정하며 법치를 존중하는 태도를 내면화하여 실천해야 한다. 청소년기부터 이런 공유 가치를 교육해야 하는 이유다. 박경귀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