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봄날이다. 어김없이 벚꽃은 나타나고 사람들을 들뜨게 하며 한국의 봄을 물들인다. 허나 이 꽃은 꺼림칙한 것이기도 하였다. 일본의 냄새가 짙었으며 실상 일제의 상징이었다. 그 몸서리치는 `가미가제 특공대`. 죽음의 길을 떠나는 홍안의 젊은이들에게 바치는 꽃이었고 바로 그 꽃잎처럼 스러지라는 권유의 꽃이었다. 그러하니 해방된 우리 `고향의 봄`엔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가 있었지 언감생심 벚꽃은 없었다. 굳이 있었다면 `사쿠라`, 화투속의 이름 혹은 변절자나 첩자를 가리키는 기분 나쁜 단어였다.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이듬해 1905년 을사년 5월 27일. 저 남쪽 진해만에 터를 잡고 일전을 준비하던 일본 연합함대는 지구의 반 바퀴를 돌아온 러시아 `발틱 함대`를 맞아 대마도 근해에서 운명의 한판 승부를 벌인다. 단 이틀에 걸친 이 해전에서 일본은 완벽한 승리를 거두며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다. 하지만 이는 대한제국에겐 저주의 전주곡이었고 또 진해는 벚꽃이 날리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은 진해에 군항을 건설하며 벚꽃을 심었고 제황산에 `쓰시마 해전 승리기념탑`을 세우며 벚꽃을 쏟아 부었다. 허나 광복 후 우리는 10만 그루에 달하는 거리의 벚나무를 모조리 베었고 기념탑도 허물어버렸다. 일본의 기억을 지우고 싶었던 것이다. 헌데 1962년 우리의 식물학자가 왕벚나무의 원산지는 제주도임을 밝혀내며 벚꽃은 회생의 전기가 마련되었고 충무공을 기리는 군항제가 열리면서 이 꽃은 그 제전의 백미가 된다.

또 하나의 벚꽃 명소 창경원. 1907년 일본은 창경궁의 전각들을 헐고 동물원을 만들며 벚나무 수천 그루를 심었다. 이름도 창경원으로 바꾼다. 이후 창경원 벚꽃놀이는 오래도록 장안의 화제이자 로망이었다. 그러나 1983년 일제잔재 청산의 기치아래 `창경궁`을 되찾으며 벚꽃은 사라지고 마니 진해와는 사뭇 다른 길을 걸었다. 그리고 서울의 벚꽃은 점차 여의도로 향했다.

다시 을사년으로 돌아가자. 그해 7월 29일 일본 내각총리 카쓰라와 미국 육군 장관 태프트 간의 `카츠라 태프트 밀약`이 있었다. `일본이 한국에 대한 보호권을 확립하는 것이 러일전쟁의 논리적 귀결이라는 일본의 의견을 미국은 인정한다.` 이어 9월 5일 미국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중재로 러시아 일본 간에 포츠머드 조약이 체결된다. `러시아제국은 일본이 한국에 대해 관리감독 보호조치를 할 수 있음을 승인한다.` 이렇듯 러일전쟁 종결을 성공적으로 중재한 공로로 루스벨트 대통령은 다음해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 그리고 드디어 11월 17일 일본은 을사조약을 강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다. 우리에게 을사년은 말 그대로 을씨년스러운 해였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루스벨트의 뒤를 이어 태프트가 대통령이 되고 일본은 워싱턴DC에 벚나무 3000그루를 기증, 워싱턴 포토맥강변은 벚꽃으로 뒤덮인다. 그런데 말이다. 여의도 벚꽃은 바로 그 포토맥강변 벚꽃이 모델이었으니. 워싱턴의 그 벚꽃은 일본의 한국지배를 도와준데 대한 감사의 선물이 아니었던가.

`저녁의 벚꽃, 오늘도 또 옛날이 되었네.` 에도시대 시인 잇사(一茶)의 탄식처럼 벚꽃은 덧없는 인생의 비유였다. 그러다가 사무라이 할복의 미칭도 되더니 급기야 제국을 위해 죽음을 재촉하는 꽃도 되었다. 꽃이야 무슨 죄가 있으랴. 제 생긴 대로 피고 질뿐. 하지만 인간은 역사와 상징과도 무관할 수 없기에 그 꽃은 심어지고 베어지며 사연도 안고 곡절도 품었다. 어쩌면 그 고혹적인 자태에다 이른바 `스토리가 있는` 꽃이기에 사람들은 더 열광하는 게 아닐까. 그리고 또 그런 역설은 어디 인간사에 한둘이던가. 유창영 대전보건대 방송문화콘텐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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