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가 이리 궤멸하게 될 줄은 보수 자신들도 상상치 못했을 것이다. 보수 진영이 민주화가 된 이른바 87년 체제 이후 대선후보의 경쟁력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위기에 빠진 적은 없었다. 범보수인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의 지지율이 각각 10%와 5% 안팎이니 집권여당이라는 말은 옛 영화가 된 지 오래다. 바른정당이 유승민 의원을 대선 레이스의 주자로 뽑았고, 한국당이 31일 후보를 최종 결정하지만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승리는커녕 상황에 따라 완주를 기약하기 힘든 처지다.

자업자득이다. 하인리히 법칙에 따르면 두 당의 토대였던 옛 새누리당에 경고등이 켜진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큰 재해가 있기 전 그와 관련된 작은 사고나 징후들이 먼저 일어난다는 게 하인리히 법칙인데, 계파 다툼과 공천 파동 같은 사고가 수두룩하지 않았던가. 결국 보수정당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이라는 전대미문의 쓰나미 앞에 완전히 버림받은 신세가 됐다. 총선에서 원내 1당을 더불어민주당에 내주고, 탄핵 정국에서 네 탓 공방을 벌이며 갈라선 뒤엔 철천지 원수가 됐다.

반면 범야권은 순풍에 돛을 단 듯하다. 어제 충청지역 경선을 치른 더불어민주당의 대권 가도는 거침이 없다. 흥행 대박 속에 고공비행을 이어가는 중이다. 문재인 전 대표를 중심으로 안희정 충남지사와 이재명 성남시장이 삼각편대를 이루며 좌우로 외연을 넓힐 대로 넓혔다. 국민의당 안철수 전 대표도 후보 경선에서 압승을 잇달아 거두며 본선행 티켓을 사실상 거머쥐었다. 투표를 꼭 40일 앞둔 가운데 보수진영 입장에선 해보나마나한 싸움이 될 것이라는 관측에 무게가 실리는 이유다.

그래서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게 범보수가 손잡는 시나리오다. 역대 대선을 보면 단일화의 유혹은 달콤하다. 6차례의 대선에서 14대를 제외하고 열세에 있던 야권 중심의 단일화가 활발했고, 마침내 김대중 대통령이 `DJP 연합`을 고리로 정권교체의 신화를 만들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도 단일화 논의가 밑바탕이 됐다. 반면 1987년 YS(김영삼)와 DJ(김대중)는 국민의 민주정권 출범 염원을 외면한 채 따로 따로 출마해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승리를 헌납했다.

물론 단일화가 전가의 보도는 아니다. 17대 대선에선 MB(이명박) 대세론 앞에 야권 단일화 논의 자체가 흐지부지됐고, 18대 때는 안철수 전 대표가 스스로 물러나는 방식의 단일화가 이뤄졌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의 벽을 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마지막 반전(反轉) 카드로 거론되는 게 제3지대 연대론이다. 범보수와 중도가 반문(반문재인)을 기치로 민주당 대세론에 맞서야 한다는 논리다. 다분히 정치공학적 접근으로서 현실성과 효과에 의구심이 든다. 또 이념과 정체성이 다른 인물과 정당의 결합은 야합이라는 비난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늦었지만 보수진영으로선 보수의 가치를 지키는 게 급선무라는 지적을 뼈아프게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 헌법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지향한다고 적고 있다. 흔히 보수 또는 우파라는 이름의 자유주의는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정통성을 지닌 이념이다. 경제적으로는 시장자본주의다. 사회평론가인 복거일 씨는 "대한민국의 이념과 체제를 제대로 잇고 지키려면, 보수는 먼저 자신의 신념이 옳다는 것을 겸허하고 깊은 성찰을 통해 다시 확인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복 선생은 이를 "어렵고도 괴로운 일"이라고 했다.

한국의 보수는 무능과 부패로 망한데 이어 분열까지 하면서 회생불능 상태에 빠졌다. 자기 혁신과 통합이라는 과제를 외면해 지지자들을 떠나게 만들었다. 빅 텐트를 치겠다는 보수진영 대선후보 스스로부터 보수의 진짜 가치를 되새길 일이다. 보수의 정체성으로 무장한 뒤 전투화 끈을 졸라 매라는 얘기다. 어정쩡하게 단일화나 연대에 나섰다간 논의가 진전되기도 전에 판이 깨질 수 있다. 성사된다 한들 본선 승리를 어떻게 장담하겠나. 통렬한 자기 반성과 겸허한 성찰이 필요한 시간이다.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선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세울 수 없다. 송신용 서울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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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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