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외환위기 때 세계적 컨설팅사 부즈 앨런의 한국 경제 보고서는 `문제가 무엇이고 대책이 무엇인지 이렇게 잘 아는 나라도 처음 보지만, 이렇게 하나도 실천하지 못하는 나라도 처음 본다`고 하면서 한국을 `NATO(No Action, Talk Only·행동은 없고 말만 한다) 국가`라고 비판한 적이 있다. 지금도 이러한 비판이 유효할까? 안타깝게도 아직도 그러한 비판을 면하기 어려운 사정이다. 그 중의 하나가 통신비 인하 논란이다. 우리나라의 통신비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중간 수준이다. 그럼에도 통신비가 부담스럽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나오는 이유는 통신비 지출 액수가 미국·일본에 이어 세 번째이기 때문이다. 소득 대비 따져보면 단연 1위다. 그렇기 때문에 통신비 인하 공약은 매 대선마다 단골손님으로 거론됐다.

이명박정부 시절에는 통신요금 20% 인하를 공약으로 내걸었으나 겨우 기본료 1000원 인하가 정부 주도로 이뤄졌다. 또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가입비 폐지 등을 구체적 목표치로 제시했다. 하지만 통신비 인하에 대한 체감도는 현저히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녹색소비자연대전국협의회 ICT소비자정책연구원은 `실질적 가계통신비 인하를 위한 정책방안 연구` 보고서를 통해 국내 소비자 10명 중 7명은 통신비가 인하되는 효과를 느끼지 못했다고 밝혔다. 71%는 2013년 이후 `가계통신비 인하 체감 효과를 느끼지 못했거나 오히려 부담이 늘었다`고 답했다. 반면 통신비 경감을 체감했다는 답변은 7%에 그쳤다. `체감 여부를 잘 모르겠다`는 답변도 22.0%로 나타났다.

이미 스마트폰 요금 등 통신비 지출이 외식 숙박비, 교육비 지출을 넘어섰다. 과연 IT 강국다운 면모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외환위기가 닥친 1997년에는 통신비 지출액이 외식 숙박비, 교육비의 약 절반 정도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후 다른 지출 항목들이 제자리걸음을 한 데 비해 통신비는 로켓처럼 급등했다. 가구에 따라서 적게는 십수만 원에서 많게는 수십만 원의 통신비를 지출하고 있을 정도이다.

IT 강국다운 면모라고 치부해버리기에는 꺼림칙한 부분이 남는 것은 왜일까? 통신비는 공정하고 합리적이며 부담가능한가? 우리의 소득 수준에 비해서 통신비가 너무 과도하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의 전제조건이 `빵`에서 이제는 `스마트폰`으로 바뀐 지 오래됐다. 이미 스마트폰 없는 삶은 상상하기 어려운 지경이다. 스마트폰은 더 이상 단순 소비재가 아니라 공공재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렇다면 국가는 모든 국민이 보편적 서비스를 받을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통신비 구조는 과연 이러한 기준을 충족하고 있는지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보편적 서비스라 함은 공정하고 합리적이며 부담가능한 요금으로 양질의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기준에 비추어볼 때 현재의 통신비 구조는 공정하고 합리적이며 부담가능한 수준이라고 보기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시장경제의 원칙은 그 전제조건으로 수요와 공급의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 달성될 수 있다. 그러나 과점적 형태의 거대 통신회사가 일방적으로 요금을 책정하는 경우는 전혀 공정하지 않다. 실질적인 경쟁의 틀을 과감하게 보장하지 않으면 결국 용두사미가 될 것이다. 둘째, 사용자 부담의 원칙이라 하더라도 가격 구조를 이해하기 어렵도록 미로처럼 만들고 그것도 모자라 수시로 변경하고 통지조차 하지 않는 경우는 소비자의 이해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므로 전혀 합리적이지 못하다. 소비자의 무지 탓으로 전가하는 가격 구조는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셋째, 현재의 통신비는 가구당 작게는 십수만 원에서 많게는 수십만 원에 이르기까지 가계에 막대한 부담을 주므로 부담가능한 정도를 훨씬 넘어서고 있다.

정부는 통신이 공공재임을 인식하고 사회기반시설의 하나로 간주해 요금의 책정에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철저하게 감독해야 할 것이다. 모든 국민이 공정하고 합리적이며 부담가능한 요금으로 통신 서비스를 누릴 때만이 진정한 IT 강국으로 가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혹여 촉박한 일정 때문에 국민의 관심사가 묻히는 대통령 선거가 되지 않도록 국민이 깨어 있어야 할 것이다. 성선제 고려대 초빙교수·미국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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