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석의 노장적 생각] 금방 죽는다

송필용作 소요유 41X53cm 캔버스에 유채 2017.
송필용作 소요유 41X53cm 캔버스에 유채 2017.
이 단어를 떠 올리면 느리고도 느리게 평정이 흔들린다. 이런 비슷한 기분이 들 때 착 가라앉는다고 표현하곤 했던 것 같은데, `착`이라는 단어가 바늘 끝처럼 거슬린다. 어딘가에 딱 달라붙어버린 느낌. 그래서 유동성이 제거되어 상승이나 승화의 기운은 아예 휘발되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 밀폐성의 답답함. 그러나 내 기분은 사실 `착`을 울타리 치는 이런 느낌들과는 많이 다르다. 차라리 좀 붕 뜬 기분 같기도 하다. 부력을 받는 중량감. 그러면서 흘러가는 그런 상태다. 이 단어는 바로 `죽음`이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 방학 초입의 조금 늦은 초저녁이었다. 나는 마당에 덕석을 깔았다. 거기 둘러앉아 우리 식구들은 닭백숙을 먹을 것이다. 엄마가 준비를 하시는 동안 모깃불을 피우고 덕석에 벌렁 누웠다. 하늘에는 초저녁 별들이 부산스러웠다. 그렇게 이른 시간에 벌써 서둘러 달려가는 별똥별도 있었다. 별동별은 달리다가 가속도를 타고 사라졌다. 나는 이유 없이 별똥별의 궤적을 내 안의 어딘가에 한참 동안 가둬두었다. 어느 것이 먼저이고, 어느 것이 나중인지를 모를 정도로 잠깐이었다. 항상 하던 일을 하면서 잠깐 누운 순간에 나는 아주 다른 세계로 급히 이동하고 있었다. 그것은 처음 경험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부족하다. 정확하게 말하려고 애써 본다면,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어떤 것으로서 태초 같기도 하고 종말 같기도 하였다. 음험한 어떤 기운이 모든 땀구멍에다가 표식을 달아 놓고 나를 훑으며 아주 천천히 지나갔다. 나는 한기가 서린 그 기운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냥 무너졌고, 방향을 잃었으며, 끝없이 추락했다. 구체적으로 체온도 떨어졌다. 닭백숙이 담긴 그릇을 들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웃으며 다가오시는 엄마도 갑자기 남이 되었다. 누나와 동생의 재잘거리던 소리들도 내게 다가오지 못하고 그냥 먼 곳에서 멈추어 웅성거릴 뿐이었다. 매우 무서운 경험이다. 닭백숙을 한 점도 뜯지 못하고, 나는 별똥별이 남긴 기억 속의 궤적을 따라 희미하게 소멸되어갔다. 몇 날을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우물에서 기력을 놓고 쓰러지기 전까지.

잠들기 전에는 항상 그 덕석의 찬 기운을 느꼈다. 긴 시간동안 그것은 하나의 의식이 되어버렸다. 내 기운은 방향 없이 소멸되면서 맥없는 분말처럼 소실점도 갖추지 못한 채 흩어지고, 정신은 안개처럼 흐려진다. 체온이 내려가다가, 공포도 아니고 두려움도 아니지만 모호하게 무섭기만 한 어떤 한기에 의해 정신이 아득해질 때쯤 갑자기 온 몸에 식은땀이 나면서 나는 축축해진다. 그 축축함은 그늘진 깊은 계곡 큰 낙엽 아래의 음습한 어떤 곳 같기도 하다. 많은 것을 습관처럼 감추기만 하는 응큼한 파충류의 눈 주위 같기도 하다. 아무것도 아니면서 매우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 사실 수시로 덤비는 그것들에 속수무책인 채 몇 십년동안 그저 식은땀만 흘리다 잠들었다. 나는 매일 이런 의식을 치루며 잠든다.

그런 의식을 치루기 시작하던 16살에 나는 분명히 딴 사람이 되었다. 그 단절 같은 두려움 앞에서 원래 열심이던 것에는 게으름을 피우고, 눈길을 주지 않던 것들에 눈길을 주었다. 허용된 모든 것이 지루해 죽을 맛이었다. 대신 금지된 것들은 죄다 재밌고 좋아서 깊이 빠져들었다. 내 성실성의 초점도 대상을 바꾸었다. 대학에 가는 일보다 정체모를 `의미`가 커보였다. 그런데 그 내면의 두려움은 오히려 내게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만용과 거친 숨결을 주었다. 방탕한 생활 속에서도 시간이 금보다 귀하다는 것을 천천히 배워나갔다. 무엇보다도 내가 금방 죽는다는 것을 몸으로 느꼈다. 밤마다 치르는 의식은 내게 인생의 유한함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돌이켜보면, 이보다 더 큰 학습은 없었다. 어찌 보면, 나는 내가 금방 죽는다는 이 체득 위에 흔들리며 서 있기 시작했고, 서있던 그 자리는 점점 견고해졌다. 또 알게 되었다. 나뿐만 아니라, 내가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내가 예뻐하는 사람이나 미워하는 사람이나 내 아내나 내 아들들까지도 모두 금방 죽는다는 것을.

금방 죽는다는 사실에 대한 체득은 언뜻 생각하면, 모든 것을 소멸시키고 포기해버리려 할 것 같지만, 정 반대로 내게 두려움 대신 순간을 영원으로 확장하려는 강한 의지를 주었다. 순간에 대한 체득은 필연적으로 영원성에 대한 갈망을 낳게 한다. 사실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것에 멈추지 않고, 그것을 흔들어서 무한 확장하려는 예술적인 높이의 도전으로 이끌어주었다. 시를 읽고 외우게 하였다. 문자보다는 그 문자들 사이를 비집고 다니는 소리의 아름다움을 알게 하였다. 이제는 더욱 분명히 안다. 죽음에 대한 체득이 삶을 튼실하게 북돋운다는 것을. 이것은 모든 크고 위대한 성취의 가장 강력한 비결이다. 곧 죽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바람직한 일보다는 자기가 바라고 좋아하는 일을 선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장자』(莊子)는 매우 두꺼운 책이다. 그 안에서 장자가 한 많은 얘기들은 인간의 무한 확장을 도모한다. 그것을 장자는 "소요유"(逍遙遊)라는 단어로 묘사했지만, 절대자유라고 말해도 된다. 「제물론」에 나오는 말이다. "해와 달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우주를 겨드랑이에 낀 채, 만물의 흐름과 하나도 어긋나지 않는다. 모든 것을 혼돈의 상태 그대로 두고 귀천 같은 것은 구별도 하지 않는다."(「제물론」편) 한 인간이 우주를 겨드랑이에 낄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였다. 그래도 이 정도는 좀 친절하게 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장자』를 펼치자말자 읽히는 내용은 더욱 광활하다. "우주의 북쪽 바다에 몇 천리나 되는 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큰 곤(鯤)이라는 물고기가 살았는데, 변해서 붕(鵬)이라는 새가 되었다. 붕의 등 넓이도 몇 천리나 되는지 모른다. 힘차게 날아올라 날개를 펼치면 마치 하늘 가득 드리운 구름 같다. 이 새는 바다가 크게 출렁거려 대풍(大風)을 일으킬 때, 그 기운을 타고 천지(天池)라고 불리는 남쪽 바다로 날아간다."(「소요유」편) 곤은 그냥 붕이 되는 것이 아니다. 우선 긴 시간의 축적을 통해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크기를 키워야 한다. 크기가 충분히 커진 어느 날 우주의 바다(그냥 바다가 아니다)가 출렁대며 일으키는 회오리바람을 타고 거대한 날개 짓을 해 구름을 뚫고 9만리를 솟구쳐 오른다. 상승하는 동력이 극점에 이르러 멈추는 순간 존재 차원에 극변이 일어나 새가 되는 것이다. 적후지공(積厚之功), 즉 두텁게 쌓은 공력이 실현되는 순간이다. 이 장엄한 전 과정을 장자는 높은 창공에서 남쪽으로 날아가는 긴 여정으로 묘사했다. 이것은 위대한 승리의 여정이다. 그 안에는 삶에 대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헌신이 깃들어 있다. 성실한지도 모를 정도로 펼치는 무극의 성실이다. 어떻게 이 정도의 삶이 가능할까? 이 정도의 삶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하는 근저의 힘은 무엇일까? 한 참 그것을 찾던 어느 날 내 눈에 한 구절이 들어왔다. 곤이 붕이되어 남쪽으로 날아가는 이 장엄한 성실성의 기초는 모두 이 한 구절에 담긴 체득에서 나온다.

내가 별똥별의 궤적을 내 안의 어딘가에 감추곤 하던 시절, 지붕은 초가에서 스레트로 바뀌었지만 벽은 여전히 흙벽이었다. 나뭇단이 쌓인 부엌은 특히 석양볕이 길고 낮게 들어왔다. 부엌에 찾아드는 석양볕은 흙벽의 갈라진 틈새를 거침없이 밀고 들어왔는데, 겨우 책받침 두께 정도에 불과했다. 당연히 흙벽의 갈라진 틈은 책받침보다도 얇다. 그 틈의 간격을 천리마가 달리며 지나치는 시간은 얼마나 짧을까? 아마 순간보다도 더 순간적이고, 찰나보다도 더 찰나적일 것이다. 이 얇은 두께의 틈새를 보통은 극(隙 혹은 郤)이라고 한다. 장자에 의하면, 우리의 일생은 고작 이 찰나적인 간격을 천리마가 지나치는 그 시간 정도 밖에 안 된다고 갈파한다. 이것이 바로 근본적인 체득으로 이끈다고 앞에서 말한 바로 그 한 구절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사람이 사는 시간이라는 것은 마치 천리마가 벽의 갈라진 틈새를 내달리며 지나치는 순간 정도이다. 홀연할 따름이다!"(「지북유」편) 장자가 말하는 무한 확장, 덕후지공, 절대 자유, 위대한 성취들은 모두 금방 죽는다는 이 처절하고도 두려운 체득에 푹 빠졌다가 건진 결과들이다. 순간에 대한 체득만이 영원으로 확장하려는 강한 욕망을 갖게 한다. 장자 철학의 핵심은 절대적으로 이 한 구절의 인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장자가 살았던 자유롭고 투철한 삶은 모두 죽음에 대한 진실한 인식을 기초로 한다.

죽음은 경험되지 못한다. 경험하는 순간 경험하는 주체의 의식이 원래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이탈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음은 누구에게나 제3자의 일로 다가올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타자의 죽음을 통해서 죽음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전부다. 내 죽음을 경험할 수는 없다. `금방 죽는다`는 말을 듣거나 의식하는 당시에는 평정이 허물어지고 내면이 동요하기 때문에 체득이 일어나는 것 같지만, 잠깐 지나면 `금방 죽는다`는 문장이 나의 일로 남지 않는다. 나에게 경험되지 않기 때문에 항상 `죽음`으로만 존재하지 죽어가는 일로서의 `사건`으로 의식되지 못하는 것이다. 보자. `죽음`은 없다. 있는 것이라고는 `죽어가는 일`이 있을 뿐이다. 체득은 `죽음`에 대하여 내용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사건`으로 직접 경험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죽어가는 사건`을 내가 경험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다만, 죽음의 구체적 상황 비슷한 경우 속으로 나를 밀어 넣을 수는 있다. 나에게 직접 닥치는 `사건`으로 체득하려면 `죽음`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평정`이 무너지며 내면이 동요하는 그 경험의 시간을 계속 늘려나가는 수밖에 없다. 기억하고 의식하는 수밖에 없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운명처럼 우연히 다가와서 집요하게 머물러 죽음을 `사건`으로 대면할 수 있기도 하지만, 보통 그런 경우는 매우 희박하므로 우리는 튼실한 삶을 위해 죽음을 의식적으로 자주 불러들이는 수밖에 없다. 인생이 짧디 짧다는 것을 항상 의식적으로 기억해야 한다.

나는 `금방 죽는다`는 사실과 `죽어가는 사건`의 실재성을 연속적으로 붙들어 놓고 싶다. 그것이 삶을 튼실하게 하는 비결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면 조용히 앉아 "나는 금방 죽는다"고 서 너 번 중얼거린다. 그러면 적어도 그 날 하루는 덜 째째해질 수 있다. 최소한 그날 오전까지 만이라도 덜 째째해질 수 있다. 나 자신을 번잡하고 부산스러운 곳에 두는 일을 그나마 조금 줄일 수 있게 된다.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소중하게 쓸 수 있게 된다. 급한 일보다는 중요한 일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된다. 그래도 사는 것이 이 모양 이 꼴인 것을 보면 나는 아직 덜 죽은 것이 분명하다. 더 철저하게 죽어버려야겠다. 서강대 철학과 교수·건명원 원장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