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인간은 비판적이고 객관타당한 것이 아니면 용인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므로 선이 객관 타당적임을 밝혀서, 선이야말로 현대 또는 영원히 존재가치가 있는 참다운 수행임을 증명하고자 한다.

근대적 인간은 인간의 이성을 자각한 것이라고 하겠다. 이 이성적 입장은 반이성적인 것을 극복해가는 과정에 항상 있게 되는 것이지, 반이성적인 것을 온전히 제거해서 이성적인 것만 있게 하는 것은 이성의 구조상에 불가능한 것이다. 이성적인 것과 반이성적인 것과의 대립은 이성의 근본 구조인 것이다. 이성과 반이성이 대립해서 이율배반되는 것을 상대적 이율배반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이성은 반이성을 항상 수반해 반이성적인 것을 궁진무여하게 제거해 버린 순수한 이성은 없으므로 이성을 참으로 이성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이와 같이 상대적 이율배반을 더욱 근원적으로 비판하면 상대적 이율배반이 절대적으로 전체적 이율배반이 되고 만다. 이것을 절대이율배반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절대이율배반은 관념적으로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절대 이율배반이 자기화 돼 버린 것이다. 이것은 근대 이성적입장에 있는 근대적 인간의 한계인 것이다. 이 절대 이율배반에 인간의 절대부정의 근거가 있는 것이다.

또 인생문제를 다룰 때 인간의 생사문제를 중요시해서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생은 사를 분리해 있는 것이 아니고 사(死)는 생(生)을 분리해서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서로 분리할 수 없는 수반의 관계에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생사적 생명은 생으로 사를 극복해가는 것은 상대적으로는 할 수 있으나 사가 없는 순수한 생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생명의 근저에 생사라는 이율배반이 있기 때문이다. 이 생사의 상대적 이율배반을 근원적으로 비판하면 그 생이 사를 수반하는 생이므로 순수한 생이라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생사적 생명은 절대적으로 사의 생명을 명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생명은 생사라는 절대이율배반을 근저로 해서 성립한 것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생사를 확충하면 물질의 생멸과 통하게 되고 더 나아가서 존재, 비존재에까지 미치게 되는 것이다.

생사의 절대 이율배반 때문에 인간은 고뇌하는 것이니 이것을 여의고 해탈하려고 하는 것은 거기에 이성적 판단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구체적으로 인간에 있어서는 생사의 절대이율 배반과 이성, 반이성의 절대이율배반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일체라고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성의 절대이율배반과 생사의 절대이율배반은 구체적으로는 일체가 되는 것이니 이것이 보통 인간의 본래적 참모습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객관적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된다.

현대의 기계문명이 발달할수록 우리 생활은 편리하고 풍부해지는 반면 사회생활은 복잡해지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 집단과 집단의 관계, 국가와 국가의 관계가 복잡하게 됐다. 이렇게 집단적 복잡화와 과학문명의 복잡화가 서로 엉켜서 우리 생활은 아주 복잡해지고 있다. 이와 같이 복잡해 질수록 우리는 그 복잡한 데에 자기 자신이 끄달려서 자기를 상실하게 된다. 그래서 현대의 특징은 분열병 또는 노이로제, 심지어 정신병이 많아지고 있다. 이것이 인간의 주체성을 상실하고 있는 현대의 큰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인간의 근원적 주체성, `본래면목`은 어떠한 복잡한 데에도 끄달리지 않고 자유자재하게 새 역사를 창조 할 수 있는 것이다.

과학문명은 우리 인류에게 물질적으로 풍부하게 또는 편리하게 생활하도록 공헌한 바가 막대하다고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오늘날은 과학문명만으로는 도저히 행복하게 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인류가 파면을 면하기 어렵게 됐다. 그렇다고 해서 과학문명을 부정할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래의 진실한 인간상 `본래 면목`이 과학문명을 밑받침해서 다시 역사를 창조할 때에 인류는 진실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실한 인간상을 깨달아야 하지마는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모두가 실지로 깨달음을 기다려 역사를 창조한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래의 진실한 인간상이 이러한 것인 만큼 진실한 인간상에 순응해서 행동함으로써 진실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역사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본래 면목은 의식은 몰론이요 무의식까지도 투과하고 거기에도 머무르지 않고 독탈무의한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문자언어 횡설수설하고 체계논리를 번론난도하는 것은 본분과는 천리만리 어긋나 버린다고 하지 않으면 안된다. 석준 스님 대전불교사암연합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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