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천생 분류기로 태어난다. 생후 2개월이 된 아기들도 배경에서 물체를 분리할 줄 안다. 망막의 시세포를 건드린 빛은 시신경을 지나면서 위계가 생긴다. 어떤 빛은 주인공이 되고 어떤 빛은 조연이 된다.

분류는 탐구의 시작이다. Science(과학)의 어원은 scissors(가위)의 어원과 만난다. 진화론의 어법으로 말하자면, science와 scissors는 공통 조상을 가진다. 분류학은 인간 지성의 기초다. 현생 인류의 기원이 궁금하다면 우선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을 구분해야 할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어째서 지구에 널리 퍼지게 되었는지는 그 다음 문제다. 개, 고양이, 사람, 컴퓨터, 소리, 빨강, 파랑 등 모든 보통명사와 추상명사는 분류 활동의 소산이다.

인간은 또한 인과율 제조기로 태어난다. 생후 3개월이 된 아기들도 공을 건드리면 굴러가고 소리 내어 울면 엄마가 달려오는 것을 안다. 아이들은 힘과 운동의 관계를 수학으로 기술하진 못하지만 반복된 경험을 통해서 안다. 그러므로 아이들도 마술을 이해한다. 물리 모델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마술이 신기하거나 재미있을 리 없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분류하고 인과율을 만든다. 우리는 분류와 인과율의 누적으로 모델을 만들고 세계를 조작하거나 예측한다. 우리는 그렇게 문명을 건설했다.

그런데 간혹 분류기는 필요 이상으로 작동한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목자의 얼굴이나 토끼 모양의 구름을 발견하면 기분이 좋아지기는 하지만, 이것은 명백한 오류다. 밤하늘을 보면서도 분류기는 여지없이 지나치게 작동하여 수많은 영웅과 전설이 밤하늘을 뒤덮는다. 분류의 시작이 지성이었다면, 분류의 끝은 어쩌면 낭만일지도 모르겠다.

인과율도 흔히 과장된다. 이탈리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 걸려 있는 보티첼리의 작품 `비너스의 탄생`에는 서풍의 신 제퓌로스가 등장한다. 바다에서 탄생한 비너스는 제퓌로스가 입으로 내뿜은 바람의 힘으로 육지에 상륙하는데, 이것이 비너스 탄생 신화가 만들어지던 시대의 인과율이다. 예나 지금이나 설명 충동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다.

하지만 분류와 인과율에는 종점이 없다. 소립자를 쪼개면 또 무엇이 나올지 알 수 없고, 궁극의 원인을 찾아 떠난 여행의 끝에서 원인 모를 무언가를 또 만나게 된다. 빅뱅 이전의 우주라니, 역시 인과율의 끝도 낭만과 맞닿아 있나 보다.

`자아`라는 관념은 가장 원초적인 분류 작업의 산물이다. 그런데 `나`라는 개체를 세계에서 도려내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셰익스피어의 희극 `베니스의 상인`에서 샤일록은 빚을 갚지 못한 안토니오의 심장살 1파운드를 도려내려고 했지만 피를 한 방울도 내지 않고 살을 도려낼 재간은 없었다. 나와 연결된 모든 것들을 그대로 둔 채로 나를 도려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람의 몸에는 뇌의 무게와 맞먹을 정도로 많은 세균들이 함께 살고 있다. 수천 종이라고 한다. 나는 여러 좋고 나쁜 세균들과 어울려 공생하는 시스템이다. 무리하게 세균을 쫓아내려고 하면 면역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세상에는 일일이 분류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사람들의 모든 행동들에 뚜렷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묻고 분석하고 따져야 하지만, 지나친 분류와 인과율은 세계를 왜곡할 수 있다. 지나치게 민감한 분류기가 작동하면 근본주의자가 되고, 이유가 아닌 것에서 이유를 찾으려고 하면 사이비 과학이 되고 음모론이 된다. 분류의 기준과 인과율에 사용되는 논리는 어쩔 수 없이 자의적이다. 나를 기준으로 세계를 왼편과 오른편으로 나누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내가 세계의 중심일 리 없다.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느껴진다면 분류기와 인과율 스위치를 조용히 꺼두는 것이 낫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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