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TV는 보지 않고 다른 인터넷이나 폰 매체를 통해 정보를 자주 얻는다. 어용 언론들의 진실을 왜곡하는 선전과 거짓, 그리고 광고에 넌더리가 나기도 했고 다양한 정보를 쉽게 알 수 있는 장점도 있는 이유에서이다. 얼마 전 여러 글들을 읽다가 페이스북 친구가 쓴 짧은 글을 보게 되었다. 글의 요지는 세상의 기득권자와 비 기득권자 간 갈등이 점점 심해질 거라는 이야기였다. 물론 기득권과 비 기득권의 개념을 나누기는 쉽지는 않지만 한마디로 표현하면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라고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요즘 TV 광고만 보더라도 그 사실을 어느 정도 감지 할 수 있다.

광고에서는 온통 `당신이 이 것(아파트, 자동차, 화장품 등)을 가진다면 특별해질 것이다`라고 떠들어 댄다. 또한 하루에 횟수로 대략 천 번이 넘는 대부업체 광고가 각 채널을 통해 돈을 가지라고 유혹한다. 편성채널들은 온통 먹는 프로그램으로 가득 차고 저마다 `이것이 최고다, 저것이 최고다`라고 극찬하며 그것을 먹은 자신이 최고인양 거짓 웃음과 감탄사를 남발한다. 물론 먹거리에 대한 불안감에서 나온 현상이기도 하겠지만 이런 현상은 마치 로마 시대를 연상케 한다. 로마의 귀족들은 참 다양한 음식재료를 사용해 맛을 즐겼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음식 중에는 조금만 먹어도 토하게 되는 음식도 있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 다른 음식을 많이 먹어 배가 부를 때 그 토하는 음식을 먹어 속을 비워내고 다시 먹을 수 있게 하는 용도였던 것이다.

로마가 왜 망했는가. 물론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백성들로 하여금 정치와 나라에 관심 가지지 못하게 하기 위해 교묘히 만들어진 먹을 거리, 가질 거리, 즐길 거리들로 인해 망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한 마디로 국가가 백성들의 통제를 위해 그들에게 본능에 충실한 삶의 패턴을 제공한 것이다. 가지지 못한 자는 조금이라도 가져 보기 위해 발버둥치다 나라에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이고, 가진 자는 그런 그들을 보며 국가를 사유화 했다. 기득권자의 지배 권력은 하늘로 치솟았지만 비 기득권자의 인권은 철저히 노예와 검투사처럼 유린됐다. 이렇듯 우리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엔 침묵하며 온통 먹을거리와 가질거리로 치장하며 더 많이 먹고 더 가지라고만 하는 TV는 마치 로마의 귀족을 닮았다.

그 친구의 글 말미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뉴스에서 보는 온갖 호재 소식들이 사실 너와는 아무 관련도 없고, 뉴스에서 보는 온갖 사건사고 소식들이 사실 너와는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물론 글의 논지에서 봤을 땐 이 문맥의 뜻이 다른 의미로 쓰였지만 나는 이 부분을 읽는 순간 섬뜩하게 초롱초롱한 예수의 눈빛과 준엄한 목소리를 떠올렸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호통 치실 때의 그 눈빛 말이다. 착각과 환상, 그리고 아둔함에서 깨어나라고 일갈을 외치던 그분의 음성을 말이다.

기득권자인 그들은 입으론 하느님을 말하고 가르치지만 비 기득권자들이 자신들의 영역에 넘어오지 못하게 율법으로 치장해 하느님이 아닌 환상만을 쫓게끔 만들었다. 가지지 못한 비 기득권자인 일반 백성들은 율법을 지키면 하느님을 가진 것이라는 환상 속에서 그거라도 지켜보자고, 하느님의 뜻과 상관없이 아등바등 율법만을 살아냈던 모습은, 지금의 세상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착각한다. 더 가지면 더 행복할 거라고. 그래서 더 먹고 더 가지려고만 한다. 그리고 언론에 나오는 호재가 나에게도 적용 될 거라고 환상한다. 역시 또한 우리는 착각한다. 언론에 나오는 악재가 내게는 영향을 미치지 않을 거라고, 그리고 안 그래도 머리 아픈 세상에 그런 악재까지 신경 쓸 겨를 없다고 침묵한다. 고개를 돌린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기득권자와 비 기득권자와의 갈등이 심화 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초세기에 망해버린 유대인들처럼 그리고 로마처럼, 자신만의 이권과 환상만을 쫓다가 다 같이 망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의 가르침은 이천년이 지난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하느님 나라는 다음 세상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인 지금이라는 것을. 지금 비 기득권자였던 과부와 약자, 고아, 고통받고 소외당하는 이를 편 들었던 당신처럼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느님 나라는 멀리 있다는 것을 말이다. 눈앞의 악과 거짓 평화를 직시하며 지금 `사탄아 물러가라`를 외치지 않는다면, 선을 지향하며 그것을 지금 목숨 걸고 지켜내려 하지 않는다면 영원한 생명도 멀리 있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 종교인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너무도 분명하다. 행동 없는 믿음만 갖고 내 종교는 무엇이고, 나는 그 종교 안에서 누구라고 말하지 말자. 부끄럽고 창피하다. 이진욱 천주교 대전교구 이주사회부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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