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들어 몇 차례 강원도에 다녀왔다. 살고 있는 마을과 가까운 곳에서 황태 사업을 하는 이와 함께였다. 형뻘인 그는 황태 생산지가 있는 횡계와 주문진 등지를 자신의 일 때문에 갔지만 나는 다만 그의 곁다리에서 말벗이 되어 주는 정도의 역할이었다. 그러니까 강원도 행은 그에게는 업무의 연장이었고 나는 그런 형 덕택에 하게 된 주중의 여행인 셈이었다.

가는 길이 가깝지 않아 번갈아가며 운전대를 잡았다. 쫓기듯 빡빡하기만 한 여정이 아니었으니 서둘 노릇도 아니었다. 쉬엄쉬엄, 느릿느릿 오고 가면서 바라보는 강원도의 겨울 풍경은 설악산자락을 경계로 확연히 달랐다.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내륙과 바다가 나뉘었다. 동해보다 서해가 가까운 지역에서 사는 터라 동해 바다를 볼 기회가 드물다 보니 갈 때마다 서해와는 전혀 다른 동해의 풍경에 매료되곤 했다.

해변에서 바라본 겨울바다의 배경은 텅 비어 있었다. 하늘과 바다가 그냥 허공이었다. 무게를 가늠할 수 없는 바다는 아득한 수평선으로부터 이랑을 이루어 파도라는 이름으로 해안에 부딪혀 부서졌다. 볼일을 마친 형과 숙소에 간단한 짐을 부려놓고 횟집에서 술 한 잔 하면서 바라본 바다는 너무도 많은 사연들로 얽히고설킨 우리네 현실 같았다.

술잔을 나누는 실내 벽에 걸린 텔레비전에서는 뉴스가 방영되고 있었다. 들으나마나 빤한 얘기들로 채워져 있을 뉴스에 새삼스럽게 귀를 기울일 이유가 없다고 애써 무시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이따금씩 텔레비전 화면에 눈길이 가곤 했다. 행복보다는 불행을, 화해보다는 갈등을 얘기하는 내용으로 점철되는 뉴스를 볼 때면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 그리 녹녹하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할 뿐이었다.

한 쪽에서는 촛불들이, 다른 한 쪽에서는 태극기가 물결을 이루어 서로의 의견을 표출하는 광경은 이제는 어떤 관습이 되어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촛불을 든 적도 태극기를 든 적도 없는 나는 마치 저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외계인이 아닌가. 이 먼 바닷가에서 술잔이나 기울이다가 머지않아 다시 돌아가야 할 일상이 더 아득하기만 했다.

대통령의 탄핵을 두고 겨우 내내 나라가 시끄러운데 눈앞의 현실이 더 절실한 좌판 위의 가난한 손길들에서는 비린내가 가시지 않는다. 그들이 목숨을 의탁하고 있는 바다엔 대통령도 없고 헌법재판소도 없고 특검도 없었다. 그들의 바다엔 물고기가 살고 해초들이 자라고 파도가 일었다. 바다가 그들의 삶이고 희망이고 꿈이라면 바다의 시간은 그들의 인생이었다. 내륙에서 촛불과 태극기가 파도치는 칠흑의 시간에 그들은 바다에 나가 집어등을 밝혔다.

생각하니 텔레비전은 판도라의 상자였다. 판도라의 상자 속에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파도치는 바다 하나가 갇혀 있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바다의 심연은 온전히 비쳐지지 않았었다. 고래와 멸치들이 거기에 더불어 살고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면서도, 그게 바다라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세상은 서로에게 네가 사라져 주어야 한다고 온몸으로 외치고 있다.

내륙에서 황태 사업을 하고 있는 형의 관심은 어디까지나 명태다. 명태는 동해바다가 내어주는 대표적인 어종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동해에서 명태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학자들은 그 원인을 바닷물 온도의 상승 때문이라고 말한다. 간혹, 방생한 명태들이 바다에서 잡힌다고는 하지만 이 겨울 덕장에서 황태가 되어가고 있는 명태들은 그러니까 전부가 수입한 명태들인 셈이다.

원인이 어떠했든지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을 때 거기에 명태들이 정말 없다면 우리의 심정은 어떠할까. 있어야 마땅할 존재들이 사라졌다며 안타까워한다고 해서 다시 살려낼 수 있을까. 적의처럼 무서운 게 없고 갈등처럼 불행한 게 없다. 상대는 보완과 보충과 도움의 관계여야지 소멸의 대상은 아니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릴 날이 멀지 않았다. 환호성을 지를 일도 아니고 슬퍼할 일도 아니다. 현실이 내일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만 터지지 않으면 된다. 바다에는 촛불과 태극기가 없다. 오직 현실인 삶만 있을 뿐. 이태관 시인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