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과 미사일만이 북한의 위협이 아니다. 맹독성 화학무기가 또 다른 실제적 위협으로 다가왔다. 김정남 암살 사건의 내막이 밝혀지면서 새삼 일깨워준 사실이다. 말레이시아 경찰은 김정남 사망원인이 화학무기로 쓰이는 신경작용제 VX 중독이라고 밝혔다. 시신의 얼굴과 눈 점막에서 VX가 검출됐다고 한다. 국제적으로 생산과 사용이 금지된 맹독성 화학물질이 어떻게 테러에 이용됐는지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말레이시아도 유입경로를 조사 중이라고 한다. 북한 정권의 잔학상은 이미 알려진 일이다. 김정남 암살에 금지된 화학무기까지 이용한 것은 또 한 번 세계가 경악하고도 남을 일이다.

김정남 독살은 그 수법만으로도 충분히 놀라고도 남을 만하다. 범행장소가 사람으로 북적이는 국제공항이다. 그것도 대낮에 보란 듯이 저질렀다. 혼잡을 이용해 주의력 분산을 노린 것이다. VX는 치명적인 독극물이지만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말레이시아 경찰도 사인을 규명하는데 열흘 넘게 걸렸다. 하나하나가 성공적인 암살 시나리오가 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국제공항답게 사방에 지켜보는 눈이 있었다. 다름 아닌 CCTV다. 범행 장면이 고스란히 담겨 전 세계에 공개됐다. 말레이시아 경찰의 수사력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것 같다. 범행과 도주를 위한 역발상으로 국제공항을 택했지만 되레 범행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결과적으로 북한이 제 꾀에 제가 넘어간 꼴이다.

국제사회는 북한이 김정남 암살에 인류 최악의 화학무기를 사용한 점에 경악하고 있다. 불특정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대규모 테러 가능성을 확인시켜준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유엔안보리는 북한의 테러에 대해 규탄하고 조사에 나서기로 했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도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하기 위한 검토에 들어갔다. 워싱턴서 열린 북핵 6자회담 한미일 수석대표회의서 이 문제를 논의했다. 테러지원국으로 지정되면 수출·금융 등 제재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서 `테러국가`라는 낙인을 지울 수가 없다. 남의 나라에서 대범하게 화학무기 테러를 자행한 북한이 국제사회의 제재를 받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북한은 VX와 사린가스 등 20여종에 달하는 화학무기를 5000톤 가량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상당수가 화학탄두로 만들어져 전방부대에 배치되어 있다고 한다. 미국과 러시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보유량이 많지만 생산과 사용을 금지한 국제 화학무기금지조약(CWC)에 가입하지 않고 있다. 핵이나 미사일은 지켜보는 눈이 많지만 화학무기는 그렇지 않다. 보다 은밀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게 화학무기다. 천문학적인 비용과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핵과 미사일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 제조비용도 적게 들고 소량으로도 수많은 인명을 살상할 수가 있다. 핵무기보다 실제적으로 사용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얘기다.

화학무기가 도심에서 테러수단으로 쓰일 경우 그 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라고 한다. 화학탄은 미사일이나 장사정포를 통해 얼마든지 쏠 수가 있다. 북한이 수백 톤의 화학무기로 공격하면 서울인구의 3분의1이 사망할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고 한다. 상상조차 하기 싫은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만 제재할 일이 아니다. 그보다 몇 배나 더 위험하고 실제적인 위협이 되고 있는 화학무기부터 규제를 하는 게 시급하다.

북한은 지난해 두 차례의 핵실험과 스무 차례가 넘는 탄도미사일을 발사했다. 올 들어서도 마찬가지다. 국제사회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보란 듯이 도발을 일삼아 왔다. 말레이시아 국제공항 테러를 계기로 북한의 화학무기가 새로운 위협으로 등장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국제사회보단 한국이다. 북한이 테러를 저지른다면 직접적인 위협에 가장 많이 노출되는 탓이다. 최고의 방안은 국제사회의 협조를 통해 화학무기를 규제하고 폐기토록 하는 것이다. 물론 핵과 미사일도 어려운 마당에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할 수는 없다.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북한 화학무기 위협으로부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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