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을 앞두고,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후보자들이 사용하는 말 한마디에 대해 거두절미하고 공격하기 바쁘다. 정치권에서 자기 당의 이익을 앞세워 싸움질만 일삼는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국민들이 다시 정치 환멸에 빠질 우려가 있다. 1,340조가 넘는 사상최대의 가계 빚에다 청년 실업률 등 국민의 생활은 갈수록 피폐해지고 있다. 국정농단으로 정치는 실종되었다. 후보자들이 상대방의 실수를 지적하여 반사이익을 얻고 화려한 공약으로 대중을 현혹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국정운영원칙과 시스템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제시하는 일이 더 시급하다. 통합, 협치를 위해 법과 제도를 어떻게 바꿀 것인지를 제시해야 한다.

협치는 거버넌스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협치는 민주주의, 시장원리, 공정, 혁신, 신뢰가 핵심이다. 협치는 기본적으로 자발적인 협력과 경쟁을 통한 협조 형태이며 국정운영의 효율성과 민주성을 높이는 국가 운영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국가가 공공문제를 해결하고 정책을 결정 집행하는데 있어 정부와 자율적으로 신장된 시민사회, 시장의 요소 등 세 주체의 협력적 네트워크를 통해 추진하는 국정운영 방식 또는 체제라고 할 수 있다. 여야 정당의 협상과 타협에 의한 국정운영은 본질적으로 협치와 거리가 멀다.

20세기말 서구사회에서 협치가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정부의 재정위기, 세계화에 따른 신자유주의의 확산과 지방화·분권화, 시민사회의 성장과 정보화 등이 있다. 서구사회에서 재정위기는 1980년대부터 경제성장률이 떨어지고 불확실성이 증가되어 조세수입 확보가 어려워지고 공공지출이 증가한데 원인이 있다고 한다. 공무원 수를 늘려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공약은 협치의 관점에서 문제가 있다. 장기적인 경기불황기에 조세수입원을 늘리기 어려운 상황에서 정부의 재정적자를 빠르게 증가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화에 따른 신자유주의는 경제뿐 아니라 현대사회의 통치방식, 우리 일상에서도 많은 문제를 낳고 있다. 세계화로 인해 정치적·경제적인 국제기구의 역할이 커지면서 국가의 통치권이 잠식되고 있다. 그래서 전통적인 국가는 큰일을 하기에는 너무 작고, 작은 일을 하기에는 너무 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국내 통치권과 권위가 세계무역기구(WTO), 국제연합(UN),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세계은행(World Bank) 등과 같은 국제기구로 이동되고 있다. 이런 배경에서 협치는 국가차원의 문제 해결과 정책결정에 있어 전통적인 권위주의 국가를 대체하는 국정운영 방식이다. 협치는 협력적 네트워크 하에서 정부가 할 일, 시민사회가 할 일, 시장이 할 일을 구분하여 민주적으로 추진함으로써 효율성을 높이는 방책이다.

지방화·분권화는 피할 수 없는 추세이다. 세계화 흐름 속에서 지방분권은 지역경제의 활성화와 지역경제 자립시스템을 구축하는데 필수조건이다. 중앙정부는 통치권 및 조정권한의 상당부분을 지자체와 시민사회에 이양해야 한다. 통제와 규제 등 국가권력의 역할을 축소시키고, 시장의 역할과 시민사회의 활동영역을 확대시키는 협치가 형성되어야 한다. 시민사회는 본격적인 산업화시대에 직업이나 업무가 다양화·전문화되고 정보화가 확산되면서 더욱 성장하고 있다.

이런 협치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국가, 시민사회, 시장 등 세 주체가 대표성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사회의 공익적 가치를 보호하고 향상시키며 자발성과 책임성을 가지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또 법과 제도가 마련되고 이를 준수해야 한다. 협치 체제에서 결정된 정책방안이 사회적인 영향력과 효력, 추진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법적인 근거가 필요하다. 협치는 민주적인 방식으로 운영되고, 국가적·사회적인 차원의 공통 목표와 과제를 가져야 한다. 각 부문의 구성원은 자율성을 기반으로 상호 호혜적인 의존관계를 형성하며, 신뢰를 협치의 가장 중요한 존립 근거로 인식하고 행동해야 한다. 사회적인 긴장과 갈등을 최소화하고 경쟁과 갈등을 상호 교류와 협력으로 전환시키며, 공익적 가치를 추구하는 노력이 전제되어야 한다. 김호 단국대 환경자원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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