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중소기업 일군 이형집 KMP회장 자서전 출판

이형집 회장이 창업한 케이엠피주식회사는 금속 인쇄 분야 세계 5위권의 세계적인 중소기업으로 성장했다. 사진=케이엠피주식회사 제공
이형집 회장이 창업한 케이엠피주식회사는 금속 인쇄 분야 세계 5위권의 세계적인 중소기업으로 성장했다. 사진=케이엠피주식회사 제공
한 분야에서 대가가 되는데 필요한 시간은 얼마나 될까? 맬컴 글래드웰은 그의 책 `아웃라이어`에서 특정 분야의 전문가 경지에 오르기 위해선 1만 시간 이상은 투자해야 한다고 밝혔다. 하루 3시간이면 10년이다. 서울대 공대 교수 26명은 책 `축적의 시간`에서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은 인공지능과 바이오 등 신산업 분야에서 축적된 기술을 바탕으로 앞서 나가지만 원천기술이 부족한 한국은 제조업 신화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고 진단했다.

50년이라는 시간 속에 원천기술 확보를 위해 끊임없이 투자하고 연구개발하며 세계적인 중소기업을 일군 기업인이 있다. 케이엠피주식회사(KMP·아산시 둔포면)의 이형집(80·사진) 회장이다. 이형집 회장은 1967년 2월 현 케이엠피주식회사의 전신인 대성금속인쇄공업사를 창업해 불모지나 다름없던 한국 금속 인쇄 분야를 개척했다. 지난 50여 년 동안 케이엠피주식회사의 대표이사로 재임하며 2012년 500만 불 수출탑, 2015년 1000만 불 수출탑을 수상하는 등 금속 인쇄 분야를 선도했다.

케이엠피주식회사 창립 50주년을 맞이한 정유년 새해 이형집 회장은 지난 50년을 묶어 한 권의 책을 펴냈다. 자서전인 `나의 금속인쇄 50년`(교학사 펴냄)이다. 책에는 금속 인쇄와 함께 한 이 회장의 50년 여정이 갈피마다 빼곡이 담겼다. 책을 통해 기업경영 뿐만 아니라 사회봉사에도 앞장 선 이 회장의 면모와 그의 성공에 원동력이 되어준 가족들도 접할 수 있다. 이형집 회장을 22일 만나 책 속에, 그리고 미처 책에 담지 못한 이야기들을 들어 봤다. 대담=이찬선 천안아산취재본부장

-평생을 금속인쇄에 바쳤는데,

"서른 살인 1967년 소규모 가내 공업으로 금속 인쇄 회사를 창업했다. 올해 여든이 됐다. 제 인생은 50년간 금속 인쇄를 하며 살아온 삶이다. 현재 케이엠피주식회사는 아산시 둔포면에 부지 1만 5000평에 건평 9000평으로 단일 금속 인쇄 분야로는 국내 최대 규모이다. 세계에서도 상위권의 회사이다. 이는 오로지 제 주위에 계신 분들과 고객 여러분들이 적극적으로 도와 주셔서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의 자랑스러운 케이엠피주식회사가 있기까지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 특히 열과 성을 다해 회사가 성장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한 케이엠피주식회사 임직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사랑 하는 가족에게도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고 싶어 책을 쓰게 됐다. 집필은 지난해부터 시작해 6개월 정도 걸렸다."

-금속 인쇄를 처음 접한 사연은 무엇이었나.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인 충청남도 청양에서 혈혈단신으로 상경해 주경야독을 하던 고등학교 2학년 때이다. 당시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금속 인쇄를 전문으로 하는 동아금속인쇄공업사라는 공장이 생겼다. 그곳에 지원 한 것이 운명이 됐다. 견습공으로 인쇄의 전 과정을 배우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처음 금속 인쇄 공장에서 일할 때는 평생 직업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군 제대 후 기술자보다 공무원이 되는 것이 낫겠다고 여겨 경찰 공무원 시험을 보았다. 10대 1의 경쟁으로 학과 시험에는 합격했지만 색맹 때문에 신체검사에서 탈락했다. 색맹이라는 신체 조건이 아이러니하게도 색에 가장 민감한 분야인 인쇄에서는 장애물이 되지 않았다. 인쇄 과정에서 제가 색을 선택하는 공장장으로 있을 때 실수도 있었지만 다른 사람과 협조하에 별 문제 없이 일들을 할 수 있었다."

-불모의 금속인쇄업을 독자적으로 창업했는데. 계기는 뭐였나?

"1967년 2월 독자적인 사업을 시작했다. 자본금 30만 원에 직원 5명의 조그마한 가내 공업이었다. 회사 이름은 크게 성공하겠다는 의지를 담아 대성금속인쇄(大成金屬印刷)로 지었다. 도깨비가 나온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허름한 집을 공장으로 얻었다. 전에 두부 공장을 하던 자리였다. 공장을 계약하고 청파동의 철공소에서 인쇄 기계를 제작해 갖다 놓았다. 대방동에서 직업 없이 지내던 십대 후반의 소년 다섯 명을 입사시켜 기술을 가르쳤다. 사업 시작하고 처음 2년은 자금이 부족해 고생을 많이 했다. 3년 차부터 사업이 순조롭게 풀려 지속적으로 성장했다."

-창업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에피소드가 있었다고 들었다.

"1964년 광천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아내도 서울로 올라왔다. 제 월급 5000원은 한 푼도 쓰지 않고 저축 했다. 생활비는 아내가 벌어 오는 돈으로만 쓰며 살았다. 아내는 처녀 때 양장점에서 일하던 경력을 살려 동네 사람들 옷을 수선해 약간의 돈을 벌었다. 결혼 생활 6개월 만에 전세금 포함 6만 원을 만들었다. 그 다음부터 허리띠를 더 졸라 맸다. 전세집을 빼 신혼생활 거처를 회사 공장 사무실로 옮겼다. 사무실에 연탄난로와 군대 텐트에서 쓰는 야전 침대 하나를 놓고 둘이서 잠을 잤다. 아내는 공장 아이들 10여 명의 밥을 해 주었다. 그 대가로 저와 아내 두 식구가 공장에서 자고 밥을 먹을 수 있었다. 변변한 잠자리도 없이 결혼 생활을 하는 저에게 손가락질 하는 친구도 있었다. 마음이 편하지 않았지만 그럴수록 성공 의지는 더 강해졌다. 고생의 결실로 결혼하고 3년 만에 30만 원(지금의 6000만 원 정도)이라는 큰 돈을 만들어 창업했다."

-어떤 결심으로 창업을 마음먹었나.

"다섯 가지를 마음 먹었다. 첫째, 정직하자. 둘째, 신용을 지키자. 셋째, 약속을 생명같이 소중히 하자. 넷째, 나와 관계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도록 하자. 다섯째,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자.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다섯 가지 결심을 지키며 초심을 버리지 않고 있다. 사업에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정직하게 신용을 지키며 나의 이익은 차선으로 놓고 다른 사람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최선을 다해 살다 보니 지금의 사업을 이룰 수 있었다."

-회사 성장이 우리나라 금속 인쇄의 변천사 아닌가.

"제가 처음 인쇄를 시작할 때는 전사지에 원고를 입혀 원판을 만드는 아날로그 방식이었다. 평판 인쇄를 한 후 수동으로 건조작업을 했다. 그로부터 10년쯤 지나니 필름으로 원판에 현상해 인쇄를 하고 자동으로 건조작업을 하는 `원 컬러 인쇄기`로 발전했다. 저희 회사는 그 과정에서 성남으로 공장 이전 뒤 1989년 충남 아산시 둔포면으로 공장을 이전하면서 제2의 성장기를 맞이했다. 독일에서 2컬러 인쇄기를 도입하고, 1994년도에는 4컬러 인쇄기를 일본에서 도입했다. 2003년 독일 LTG사의 마일리지 6컬러 인쇄기를 도입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2014년에 6컬러 인쇄기, 2017년 8컬러 인쇄기를 추가 도입해 자타가 인정하는 세계 5위권의 금속 인쇄 공장으로 자리매김 했다. 우리 회사의 기술 수준은 선진국인 독일이나 일본, 미국보다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우리만의 독특한 기술인 스마트 컬러로 오히려 선진국보다 앞서가고 있다."

-수출 규모도 상당하다고 들었다.

"외국 바이어들도 우리 회사의 인쇄에 만족한다. 한 번 거래를 시작하면 중단하는 일 없이 오랫동안 지속한다. 회사 이름을 대성에서 KMP(Korea Metal Printing)로 바꾼 것도 세계가 주무대인 금속 인쇄 전문 회사로발돋움하는 발판이 됐다. 높은 기술력으로 뉴질랜드, 호주, 미국, 아프리카, 유럽 등 세계 각지에서 참치 캔 및 분유 캔 인쇄를 수주했다. 국내 뿐만 아니라 외국과 거래도 많다. 2017년 2000만 불 수출의 탑 수상도 가능할 것으로 본다."

-시련과 어려움은 없었나?

"IMF 경제위기와 노사갈등의 시련이 있었다. 1998년 IMF가 터지자 공장에 들인 최신 기계설비의 차관이 문제가 됐다. 달러로 빌린 차관이어서 환율이 급등하자 은행 부채가 앉은 자리에서 두 배가 됐다. 회사는 도산 위기에까지 몰렸다. 회사가 가동돼야 직원들 일터가 있고 경영주도 살 수 있을 것이란 설득에 전 구성원들이 함께 위기를 헤쳐 나갔다. 비 온 뒤 땅이 더 단단해지는 것처럼 노사갈등의 어려움도 잘 극복하고 노조와 경영자가 서로 함께 살 수 있는 길을 찾아 노력하다 보니 회사가 6-7년 전부터 제3의 도약기를 맞고 있다. 이제는 직원 160명, 연 매출 500억 원에 이른다."

-앞으로 계획을 듣고 싶다.

"제 인생의 가장 큰 목표는 `사업의 성공`이고, 가장 큰 행복은 `가화만사성`이며, 가장 큰 보람은 `봉사하는 삶`이다. 제 삶과 사업의 성공비결도 남에게 이익을 주는 것에 있다. `남을 위한 것이 나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기업 활동에도, 사회 활동에도 적용하며 살았다. 이제 좋은 일만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남은 생애를 보람되게 보내려고 한다. 지금까지 경험을 후배들과 나누는 일에도 힘쓰겠다." 정리=윤평호 기자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이 회장의 자서전 `나의 금속인쇄 50년`에는 한국 금속인쇄의 발자취를 엿볼수 있다.
이 회장의 자서전 `나의 금속인쇄 50년`에는 한국 금속인쇄의 발자취를 엿볼수 있다.
이형집 회장이 창업한 케이엠피주식회사는 금속 인쇄 분야 세계 5위권의 세계적인 중소기업으로 성장했다. 사진=케이엠피주식회사 제공
이형집 회장이 창업한 케이엠피주식회사는 금속 인쇄 분야 세계 5위권의 세계적인 중소기업으로 성장했다. 사진=케이엠피주식회사 제공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