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더러 선을 말하라면 나는 무엇을 말해야 좋을지 모른다. 절름발이 언어가 완전의 대변자 되기에는 불완전한 것임에야 내가 어찌 새삼스레 구설을 늘어놓으랴. 그러나 한 포기 꽃이 없는 시공에 자리를 갖출 때에 이 꽃은 곧 우주라, 나타낸 것을 두고 다시 우주가 있겠는가. 불완전과 완전이 다른 것이 아니니 불완전 속에 완전을 파악하는 것, 상대적인 것에서 절대를 보는 것이 이것이 선이리라. 우주를 파악하는 것은 이를 방하하는 것이며 이에 침투하는 것은 곧 이를 초탈함이다. 선은 알고 모름이 아니니 이는 지척이 천리다. 가로되 선은 종교라 하고, 또 이르되 선은 철학이라 하고, 또 이르되 선은 예술이라 하더라.

다 옳은 말이긴 하나, 맞은 답이라 할 수 없으니 철학과 종교와 예술을 초월하고 일초,일목 ,일동, 일정, 물물두두(物物頭頭)에 아름다운 위의를 갖춘 것이 선이다. 나더러 굳이 선을 말하라면 선이란 종교에서 형식적 의례를 빼고 철학에서 논리적 사유를 제하고 예술에서 기교를 버린 것이라 하는 수 밖에 없다. 균정, 상칭, 조화, 논리를 떠나 부조화의 조화, 비논리의 논리, 무목적이 합목적인 멋의 나라 그것이 선의 세계이기도 하다. 생명의 실상에 바로 거래한다. 시의 원천에 소요하며, 선의 전당에 만취한다. 생명 그대로의 발로이다.

선이란 원래 구극의 자리에서는 분별이 없다. 그러나 때와 곳과 근기를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나누게 됐으니 대별하면 선이란 것은 둘로 나눌 수 있다. 즉선(상도선)과 산선(선외선)인 것이다. 또 교선은 선(禪)과 식(識)을 전문으로 하지 않는 이가 언동에 선리를 나타내는 것 말한다. 왕양명이 역적 진호를 칠새 포화상교의 사이에서 종용(從容)해 강학을 계속한 것이라든지 모든 충의절사가 임사의 자리에서 태연자약한 것, 이 또한 선이 아니면서 곧 선인 것이다. 그러므로 선에서는 의식, 무의식을 나눌수 없으니 그들이 어찌 평소의 수양이 없이 생사에 초연할 수 있겠는가. 선은 원래 하나이니 아무리 선을 하겠다 마음 먹어도 마침내 생사를 초탈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선을 하지 않으면서 능히 선의 구극인 생사에 초탈한 이도 있으니 후자가 더 참의 선을 했음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선은 다시 인도선과 중국선으로 나눌 수 있다.

인도선은 크게 외도선, 범부선, 소승선 등으로 나눈다. 외도선은 `나` 이외의 신 또는 하늘을 인정하고 이 세계를 장악해 신의 세계에 이르고자 하는 염수(念修)이다. 범부선은 인과의 도리를 믿으나 아직 진실한 불리에 미치지 못한 수행을 이름이요. 소승선은 아공법유의 구사론 그대로 무아로써 구극을 삼는 것인데 사선팔정이라 해서 초선, 이선, 삼선, 사선, 공무변처정, 식무변처정, 무소유처정, 비상비비상처정이 있으니 멸진정으로서 최고의 자리를 삼는다. 여래선은 대승선이니 `오아법이공 소현진리이수자(悟我法二空 所顯眞理而修者)`가 그것이다. 무아뿐 아니라 내지일체의 외계일체법공의 묘체를 오득하는 것으로 구극목적을 삼는 것이니 그 최고의 경지를 금강정이라 한다.

중국선 중 최상승선(여래상상선, 여래청정선, 조사선)은 인도의 여래선에 중국적 풍격을 가해 발달된, 즉 노유선의 사이에 일어난 삼교교섭의 결과로 이루어진 가장 높은 선이다. 여래선의 28조로 서천에서 중국에 오신 달마로 이 조사선의 초조를 삼는 것이다. 자기가 본래 부처라는 마음 아래서 수행오입하는 선이다. 달마문하선이라고도 한다. 이 종지는 무상부설 불단번뇌 일심일여(규봉종밀 선원제종집도서 참조)의 중국재래의 참조하면 좋다. 재래의 선은 심재, 좌망, 망기, 재물, 부초, 전진이다.

선의 수행자는 집이 없으므로 가는 곳이 다 집이 된다. 수하석상이 운수의 집이다. 선원에 가면 큰방이라는 데에는 `청산`과 백운이라는 좌석이 따로 있다. 손님 수행자는 이 백운이라는 자리에 앉는다. 주인은 청산이요, 손은 구름인 것이다. 언제 갈지 모르는 구름인 것이다. 선의 생활은 풍류의 생활이기도 하다. 그러나 부화한 풍류가 아니요, 인생과 우주를 찾는 진실한 풍류다. 누덕누덕 기운 옷을 깨끗이 빨아 입고 굵직한 주장자를 짚고 작은 다리를 건너고 굽이진 석경을 돌아가는 운수를 보면 그야말로 구름과 물같이 맑으며 고요해 물외를 벗어난 도인같이 보이는 것이다. 도를 깨치지 못해도 벌써 도인이 다 된 것이다. 이와같은 마음과 행동의 모습이 변화돼 가는 것이 수행자의 선의 생활이다. 석준 스님 대전불교사암연합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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