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외고 합격 정명준 학생

동네 학원만 열심히 다녀도 서울대 가던 시절이 있었다. 사교육 시장이 교육 전반에 영향력을 미치기 전인 1980년대 이야기다. 요즘이야 지방 광역시나 중소도시들도 서울 강남처럼 신·구도심을 가르는 학군 격차가 생기고, 유명학원이 밀집한 지역이 형성됐지만 그 시절에는 아이템풀 정도 풀고, 좀 더 학업에 관심있으면 동네 학원에서 영어·수학을 배우는 정도가 대부분이었다. 동네 학원은 2000년대 이후 오랫동안 초등학생 전용 보습학원 정도로 전락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살짝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 대형 학원들이 전문화·분업화하고, 유명 강사들이 따로 학원을 차리거나 과외 시장으로 돌아서면서 다시 동네 학원들이 기지개를 펴고 있다. 물론 규모가 작다 보니 경기 침체의 영향을 받지만 짜임새있는 맞춤형 강의는 학생과 학부모들의 큰 호응을 얻고 있다.

2017학년도 대전외국어고 중국어과에 합격한 정명준 학생(대성중)은 집 근처 `캡이지 학원(대전 중구 목동초 옆)`에서 배운 영어 실력으로 쟁쟁한 둔산권 학생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외국어고는 중학교 3년 동안의 영어 성적으로 합격과 불합격이 나뉜다. 스스로 동네 학원 출신이라는 정명준 학생의 대전외고 합격기를 들어봤다.

◇동네 학원에서 용 났다

정명준 학생은 원래 영어를 싫어했다. 단어도 많이 외워야 하고, 단순 반복 공부가 귀찮다고 느꼈다. 스스로 이과형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런데 외국어고교 진학을 고민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문제는 영어였다. 중학교 3년 동안 꾸준히 1,2등을 할 정도로 학구열과 끈기가 있었지만 자신에게 맞는 공부법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사실 유명하다는 둔산권 학원에도 다녀 봤어요. 영어 문법 3800제를 가르치고, 관련 문제를 풀게 하는 형식이었는데 전혀 도움이 되질 않더라구요. 그러다 집 근처 캡이지 학원을 소개받아서 다니기 시작했는데 실력이 붙는 것을 스스로 느낄 수 있었어요. 고교 영어 모의고사를 풀어보면 단박에 알 수 있거든요. 공부 스타일도 안 맞는데 대형학원의 커리큘럼을 따라가기 보다는 가까운 동네 학원에서 맞춤형 공부를 하게 된 것이 대전외고 합격의 숨은 비결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집 근처 동네 학원을 선택한 이유는 또 있다.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둔산권의 대형 유명학원을 오가는 시간만 줄잡아 한 시간이 넘는데 차라리 자투리 시간으로 생각하고, 집중해서 공부하는 게 낫다는 판단 때문이다. `시간=실력`이라는 불변의 법칙을 일찌감치 깨우친 셈이다. 여기에 비교적 소규모 학급으로 운영되다 보니 원장 선생님이 자신의 장단점과 공부 습관을 자세히 알고 있다는 점도 도움이 됐다고 강조한다.

"제가 반복적인 공부 방식을 싫어한다는 점을 알고 수업 중에 기출문제의 필수 내용만 족집게처럼 짚어줘서 영어 자신감을 키우는데 큰 도움이 됐어요. 시험에 실제로 나온 내용을 배우고, 점점 파생되는 문제유형에 적응하는 방식이었어요. 어휘도 무작정 200개 씩 외우는 둔산권 스타일과 달리 어원부터 파생단어까지 생각을 키울 수 있었어요. 이를테면 hospital(병원)이라는 단어에서 H는 hygiene(위생), O는 operation(수술) 등으로 확장하는 식입니다. 또 학원에서 개설한 영자신문 타임즈코어 강의를 통해 최신 국내외 토픽을 공부한 것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영자신문을 읽는 사이에 쓰기와 읽기, 문법이 저절로 보완되고, 기사에 딸린 QR코드로 원어민 듣기까지 해결했습니다."

◇동네 영어로 TED강연까지

정명준 학생이 가슴에 품고 있는 말이 있다. `도광양회(韜光養晦)`다. 1980년대 중국의 대외정책 용어로 자신의 재능을 드러내지 않고 참고 기다린다는 뜻이다. 영어 공부도 그랬다. 동네 영어로 기본기와 실력을 꾸준히 다진 뒤부터는 본격적으로 대전외고 입시를 준비했다. 대성중 영어소설&팝스반 동아리에 가입하고, 한국어판으로 읽던 `어린왕자`나 `해리포터` 시리즈를 원서로 읽기 시작했다. 캡이지 학원의 수업 방식에서 터득한 어휘와 청취력을 바탕으로 TED 강의도 열심히 찾아 들었다. 우선 한글 자막으로 내용을 이해한 뒤 무자막에 도전했다. 보고 듣기를 반복하면서 강연자들의 다양한 발음을 익히려고 노력했다.

동네 영어로 시작해 TED강연까지 섭렵하는 사이에 전공과 진로를 정할 인생의 모멘텀도 발견했다. 바로 경제학자 마틴 작스(Martin Jacques)의 `떠오르는 중국을 이해하기` TED강연이다. 마침 초등 시절 화교학교를 다녀 중국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HSK(한어수평고시) 시험을 치러보지는 않았지만 최상위 레밸인 6급 정도 수준을 갖췄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를 원서로 읽어낸다. 당연히 `중국 대세론`을 설파하는 마틴 작스의 TED강의는 눈길을 끌었다. 유럽 시장을 중국이 지배할 것인지에 대한 서양인들의 관점을 직접 강연을 통해 체득하면서 자연스럽게 경영·경제분야를 전공해 보겠다는 의지를 갖게됐다.

명준 학생의 장래 희망은 KOTRA(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에 입사해서 통상지원본부 중국사업단에서 한국 기업들의 중국 무역을 돕는 일이다.

"대전외고 중국어과에 도전한 것도 대 중국 무역이 막대한 비중을 차지하는 현실에서 한국 경제를 위해 작은 밀알이 되겠다는 신념 때문입니다. 또 유학을 가지 않더라도 높은 수준의 중국어와 영어를 배울 수 있고, 중국 문화를 많이 접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어요. 대전외고에서도 경제와 경영이해 활동과 관련한 동아리에 가입해서 지식과 경험을 쌓고, 나라의 경제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경제장관 꿈 키우는 동네 영어

명준 학생은 자신의 `동네 영어`가 자랑스럽다. "어머니가 캡이지 학원 홍보대사를 자처하는데 비둔산권 학원이라고 무시 당하신다고 푸념을 하세요. 이상하게도 저는 그럴 때 오히려 기분이 좋아져요"라고 너스레를 떨 정도다. 말 속에는 뜻이 있다. 개천에서도 얼마든지 용이 날 수 있다는 신념이다. 이런 생각은 가슴 속에 품고 있는 꿈과 무관하지 않다. KOTRA에서 실무 능력을 키우고, 더 나이 들어서는 대한민국을 부강하게 만드는 경제장관이 되겠다는 꿈이다.

"슛이 약한데도 학교 주전 농구선수로 뛰었어요. 친구들에 비해 드리블과 수비 능력이 좋고, 경기 흐름을 잘 읽는다는 이유였어요. 결정적인 한방도 중요하지만 전체를 아우르고 관통하는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영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동네 학원에서 배운 영어지만 유창함보다는 진정성을 내재할 수 있다면 더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경제장관이 되겠다는 꿈도 결국 진정성이 관건이죠."

명준 학생은 대전외고 면접시험 질문을 언급하며 자신의 세계관과 포부를 밝혔다.

"공자는 배우고 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고 말씀했고, 맹자는 책에 나온 내용을 다 믿는 것은 책이 없는 것만 못하다(盡信書則不如無書)고 했어요. 성현들의 말씀처럼 늘 생각하고, 이유를 따져보면서 실력을 키울 생각입니다. 대전외고에 진학해서도 중국 경제의 현재와 미래를 탐구하는 동아리를 만들고 싶어요. 글로벌 경제 위기 속에서 어떻게 하면 한국의 위상을 높일 수 있을지를 고민할 계획입니다. 3년 동안 열심히 활동해서 대전을 넘어 전국을 대표하는 중국 전문 동아리로 키워내겠습니다."

권성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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