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온지 4년째 되는 쁘띠와

다카의 신부 리나의

전화 결혼식이 열리는 날

소주병에 눌어붙은 붉은 두끼비마냥

가리봉 이주노동자들이 공단 쪽방에 모여 있다

춥게 웅크린 저녁이 그들을 따 마시는 동안

한번 서로의 안주가 되어보지 못한

쁘띠와 리나가 전화선을 비집고 입장한다

신부의 여린 숨결에도 찢기고 터진 등허리들은

기억니은으로 엎어져 아프다하는데

작업복으로 가만히 수화기를 감싸는 사내

젖은 그림자가 바다를 건널까, 취하여 비틀대는 어둠들을 비끄러맨다

마을 목사의 설교 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스민다

모자란 잠 때문에 맥없이 감겨오는

눈꺼풀들에서도 비가 서린다

거, 요새는 전화로도 같이 잠을 잔다는데, 이참에

첫날밤도 전화로 세우지 그러나? 엷은 웃음들이 서로의 콧김에 바람을 불어넣으면

구공탄처럼 금세 뜨거워지는 두꺼비들

1910년대 미국 이민사에서는 사진결혼이라는 풍경이 펼쳐진다. 초기 이민자 수의 불과 10%만이 여자였다. 당연히 홀아비들로 넘친 외국 이민자들에게는 많은 사회문제가 발생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방법으로 미국정부가 사진결혼을 용인했다. 이런 상황은 일본인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어서 일본인부터 시작하여 한인들에게도 시도되었다. 문제는 사진을 보고 서로를 선택하는 것으로 남자들이 나이와 학력을 속이는 경우가 종종 있어 파국으로 가는 경우가 있었고, 명석한 여성들은 현실을 수용하고 남편을 단순 노동에서 기술 직업으로 바꾸도록 격려하여 진취적인 가정으로 이끄는 능력도 발휘했다.

어쩌면 그날의 시련이 1세기를 건너서 한국을 세계 경제 11위에 이르도록 했으리라. 마찬가지로 이제 동남아에서 한국으로 취업을 와서 경제활동을 벌이는 외국인들. 그러나 이들에게도 시간과 공간의 문제는 그렇게 녹록치 않은 듯. 그들에게는 전화 결혼이라는 풍습이 펼쳐지는 듯하다. 이들에게는 남녀가 서로 전화를 통해 목소리와 화상으로 결혼하는 것이니. 비록 1910년대 한인 이민자들이 경험한 사진 결혼의 답답함은 없겠지만. 세상에! 전화로도 결혼을 하고 또 전화로도 첫날밤을 세울 수 있다니. 시인·한남대 국어국문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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