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정하게 깎아주세요." 미용실 의자에 앉자마자 말한다. 단호한 목소리로. 거울에 비친 미용사와 눈을 맞추며 고개도 살짝 끄덕인다. 제가 원하는 거 아시죠, 라는 마지막 확인 절차. 이제 눈을 지그시 감고, 단정하게 변해있을 모습을 상상하며 혼자 흐뭇해한다. 사각사각. 사각사각. 단정해지는 소리. 드디어 미용사가 자신의 완성작을 공개하겠다며 말한다. "안경 쓰고 한 번 보세요. 괜찮으세요?" 눈을 뜨고, 거울을 응시한다. 잠시 후 깨달음의 순간이 찾아온다. 나의 `단정하게`와 당신의 `단정하게`는 어찌 이리도 다르단 말인가.

의사소통이 힘든 공간이 있다. 시가, 처가, 학교, 직장. 사람들마다 힘들어 하는 공간이 다를 뿐, 누구에게나 소통이 힘겨워지는 공간은 존재한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미용실이다. 특히, 유일하게 할 수 있는 표현이 "단정하게 깎아주세요"밖에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게 미용실은 인간 언어의 한계와 직면하게 되는 공간이다. "단정하게"라고 똑같이 말했는데, 결과물은 다 다르다. 미용사가 열이면 열이 모두 다르다. 어떻게 입력은 동일한데, 출력은 모두 다를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모든 결과물은 어떻게 내가 생각하는 단정한 머리의 모습과 다 다를 수 있는 것인가.

`단정하다`는 것은 추상적인 개념이다. 추상적인 것은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마다 그 개념을 해석한 내용이 다를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 단정한 머리는 짧게 자른 스포츠머리지만, 다른 사람에게 단정한 머리는 2대 8 가르마에 포마드를 잔뜩 발라서 머리털 하나도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시킨 머리일 수 있는 것이다.

추상적인 개념은 우리 눈앞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마다 동일한 언어로 표현되는 개념을 다른 모습으로 마음속에 그리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우리가 추상적인 개념을 가지고 누군가와 의사소통을 하게 되면, 오해가 발생할 가능성이 커진다. 두 사람 모두 `단정하게`라는 똑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두 사람의 마음속에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각자 자신의 마음속에 떠오른 모습만을 보면서, 그 모습이 바로 상대방이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상대방과 소통하고 싶다면, 상대가 우리의 마음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전달하고자 했던 의미를 상대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때 `오해`라고 하는 괴물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눈에 띄지도 않을 만큼 작은 모습으로 태어나지만, 순식간에 관계를 망쳐버리는 괴물로 자라는 것이 바로 `오해`다. 따라서 소통을 원한다면 상대방이 내 말의 의미를 해독하지 못하고 헤매게 방치해서는 안 된다.

오해를 피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구체적으로 소통하는 것이다. 미용실에서 경험했던 소통의 어려움에 대해 하소연 했더니, 어떤 분이 해결책을 알려주셨다. "단정하게 깎아주세요"라고 말하는 대신, 내가 원하는 단정한 머리를 한 사람의 사진을 먼저 찾으라고. 그리고 그 사진을 가지고 가서 미용사에게 이렇게 깎아달라고 말하면 된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나와 상대가 모두 같은 것을 마음속에 떠올릴 수 있다. 그 덕분에 오해의 가능성도 줄어드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소통하라고 말은 하지만,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은 여전히 힘들다. 구체적으로 말하는 사람에 대한 고정관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세세한 부분에 대해 이야기 했을 뿐인데, 깐깐하다는 말을 듣는다. 별거 아닌 걸 가지고 따진다고 하고, 심지어는 싸우려 든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을 주저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누군가가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은 상대에게 명확하게 자신의 의도를 이해시키기 위해서 애쓰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의도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의도적으로 추상적인 개념을 사용해서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추상적인 단어를 사용했을 때의 이점은 나중에 그 뜻이 다른 뜻이었다고 말을 바꾸기 쉽다는 것이다. 따라서 추상적인 개념으로 가득 찬 말이 있다면 한 번쯤 그 말의 실체가 무엇인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전우영 충남대 심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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