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정조가 즉위한 1776년 가을 마을에 관리들이 들이 닥쳤다. 그런 외딴 마을에 그렇게 많은 관리들이 오는 일은 드믄 일이었으며 촌장을 비롯한 온 마을사람들이 모두 나가 마중을 했다.
관리들은 군관 한 사람과 군졸들이었으며 그들은 유배수 한 사람을 데리고 왔다.
군관은 유배수를 포박하지 않고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유배수는 죄인이지만 양반이기 때문이었다. 유배수는 마을 어귀에 있는 오두막으로 안내되었다.
오두막은 방 하나 부엌 하나뿐이었으며 대문도 담장도 없었다. 군관은 갖고 온 몇 포기의 탱자나무들을 집 주위에 심어 놓고 그 집이 유배수가 살 집이라고 말했다. 군관은 촌장에게 말했다.
"이건 고을 수령님의 지시이니 잘 들어라."
촌장과 그 마을 사람들은 앞으로 그 집에서 살게 될 유배수가 유배가 풀릴 때까지 그 집에서만 살도록 감금하고 식사를 제공해야 된다는 말이었다. 유배가 언제 풀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유배란 죄는 사실상 종신형이었는데 국가는 유배수를 직접 다루지 않고 유배수를 다루는 책무를 지방 군수에게 맡겼다.
그리고 그 책임을 맡은 군수는 관하에 있는 외딴 마을의 촌장에게 그 책임을 떠넘겨 종신형을 받은 유형수가 죽거나 유배가 풀릴 때까지 감금하고 식사를 제공해야만 했다.
유배수란 그렇게 세계에서 유례 없는 형벌이었다.
그때 잡초마을에 유배수를 데리고 온 군관과 군졸들도 그렇게 촌장에게 유배수를 넘겨 놓고 모두 가버렸다. 나머지는 촌장이 알아서 하라는 말인 것 같았다.
유배수는 관복도 입지 않았고 양반 옷도 입지않았으나 어딘지 모르게 품위가 남아 있었다. 아직 30대로 보여졌는데 키가 크고 건장한 몸이었다.
"나리 방으로 드시지요."
좁은 방이었으나 깨끗하게 새 멍석이 깔려 있었다.
촌장은 담배쌈지와 부싯돌 재떨이를 내놓았다.
"고맙구만…. 이 집주인은 없소."
"늙은 포수가 혼자 살고 있었는데 몇 년전에 범 사냥을 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비어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방의 선반에 칼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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