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병배 논설위원
나병배 논설위원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어제 대선 출마를 거두었다. 귀국해 대선 판에 뛰어든 지 만 20일째 되는 날 내린 결정이다. 그는 불출마 변에서 "국민대통합을 이루려는 순수한 애국심과 포부가 인격살해에 가까운 음해와 각종 가짜뉴스로 정치교체 명분이 실종됐다"고 했는데, 그렇게 느꼈다면 어쩔 수 없다. 일찍 용단을 내린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우유부단하게 결정을 미루었더라면 대선 판의 불확실성을 증폭시켰을 것이고 무엇보다 지지를 보내준 국민들에게 더 큰 상처를 남겼을 수 있다.

10년 국제기구 수장으로 있을 때 반 전 총장과 대선 주자로서 반 전 총장 실체 사이에는 괴리감이 느껴졌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대선 메시지에는 명료함이 부족했고 정체성, 이념적 행보도 국민들을 헷갈리게 한 측면이 없지 않다. 초반엔 낯 설고 정치 학습 미비에서 기인한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제법 시간을 흘렀음에도 유의미한 변화가 감지되지 않았다. 그에 대해 전환기적 상황에 직면한 나라 운영을 맡겨도 괜찮은 그릇인지 의문을 품는 이들이 점차 늘어난 것과 무관치 않다. 그러다 보니 귀국 컨벤션 효과는커녕 지지율 후진이라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설 연휴를 지나 13%대까지 추락했으니 정치신인으로서 매력을 잃어간 것이나 다름 없으며 그냥 눌러 앉아있는다 해도 반등 모멘텀을 찾기가 여의치 않았다.

모든 것은 반 전 총장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대통령 탄핵 사태가 불거지기 전까지 은근히 높은 지지율을 보이자 주변 인사들은 물론이고 충청권까지 들썩였다. 그때 쯤 반 전 총장은 상상 속 꽃가마에 올라타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는 대선 출마를 결심했으면 그에 상응한 능력과 비전, 명료한 국정철학을 드러내고 판단을 받았어야 했다. 국제무대에서 놀던 유력 인사라면 우리 정치·경제·사회 등 제반 영역에서 글로벌 기준을 제시했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런 반 전 총장에 대한 기대치가 실망세로 꺾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는 게 한계점이었다.

반 전 총장은 자신과 유엔에 본의 아닌 오점을 남긴 꼴이 됐다. 말마따나 나라를 위해 외곽에서 돕는 역할에 만족했다면 대선 낙마라는 달갑지 않은 불명예 훈장을 추가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를 대선 무대로 밀어 올린 주변부와 지역정서에도 과오가 아주 없다고 말 못한다. 그런 면에서 반 전 총장 과실과 판단 착오 부분을 떠나 그도 일정부분 피해자로 볼 소지도 있다. 그가 이번 대선 판에 `소환`당한 측면이 없지 않고 동시에 그런 강권과 정파이해 논리에 포섭된 게 패착이었다는 분석이 나오는 배경이다.

역설적이지만 반 전 총장 사례는 여타 대선 후보들에게는 타산지석이다. 그의 실패에는 복합적인 사유가 녹아있다. 정치적으로 연단되지 않은 채 대선 판을 쉽게 보고 달려든 것도 그렇고, 동시에 지지 정파와 지지층이 부재하면 대선은 난공불락의 요새임을 증명해줬다. 국민들은 또 반 전 총장 같은 공직 경력과 경륜도 콘텐츠가 빈약하면 한 순간에 훅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지금 대선 고지를 타고 있는 대선 주자들도 이 대목에서 교훈을 얻고 스스로를 객관화시켜볼 필요가 있다. 한 나라의 국정을 이끌어 나가는 데 과연 합당한 인물인지, 다른 과실을 노리고 대선 주자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할 때임을 자각해야 한다.

골프에서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라고들 한다. 부분적으로 맞는 말이다. 하지만 정치 영역에서, 특히 미구에 다가올 수 있는 조기 대선을 향해 뛰고 있는 이들 또한 누구라도 반 전 총장 뒤를 따라 갈 수 있음을 인식할 일이며, 자기검열과 함께 내적 충전 노력을 게을리 해선 안 된다.

반 전 총장은 충청대망론의 1차 진원지로 지목됐다. 그 말고도 안희정 충남지사, 정운찬 전 총리, 이인제 전 의원들이 있지만 지지율 수치로 보나 유엔 사무총장 경력 무게감으로 보나 초반 주목도 면에서 앞서 나갔던 게 사실이다. 이제 그는 대선열차에서 중도하차한 처지가 됐다. 머물던 자리에 대한 깔끔한 정돈이 필요해 보인다. 라병배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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