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구영 교수
허구영 교수
아주 오래 전, 전시 오프닝 뒤풀이에서 당시 존경하는 선배작가로부터 들은 `앞으로 작가는 멀티플레이어가 되어야 한다`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성공적인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전 방위에 걸쳐서 예술적 관심이 있어야 함은 물론이고 그 실행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현재 미술의 상황은 지극히 미술 내적인 것(specialist)이거나 거꾸로 미술 외적인 영역으로의 확장(multi-player)이라는 두 방향에서 그 간극이 첨예화되고 그 현상이 점점 더 일상화되고 있습니다. 나아가 미술가들에게 그 양극단 사이에서의 선택을 강요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선택적 상황에서 현장의 미술가들이 갖는 심리적 부담과 압박 또한 상당하고 나 또한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제 막 미술계에 발을 놓으려는 젊은이들은 아예 처음부터 그 진입을 회피하거나, 또 그렇다 하더라도 오래 지나지 않아 작업에 절망하는 일이 허다한 것이 지금 미술계의 현실입니다. 또 이런 현상은 비단 미술계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 팽배한 전반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주워 담기 힘든 무거운 얘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와 관련하여 엉뚱할 수 있는 제 개인적인 얘기를 좀 더 해보려고 합니다.

"박이소 작가의 `무엇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욕망은 결국 낭비이고 허망한 일이라고 인식한다` 이 말을 작가로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굳이 이 말의 전후 맥락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대체로 그가 말하고자 했던 바는 충분히 짐작되고 나 또한 대체로 이에 공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 그가 말하고자 했던 맥락하고는 상관없이 `낭비이고 허망한 일`이라는 부분이 굉장히 거슬리고 거북하다. 이런 소인에 대해 밝힌다면 역설적이게도 나는 지금껏 `낭비이고 허망한 일`이라는 지점에서 예술의 출구와 가능성을 봐 왔고, 이를 애써 지지해 왔다. `낭비이고 허망한 일`이라는 잉여의 지점이야말로 예술이 가장 소중히 해야 할, 예술이 기거하게 될 공간이라고 여긴다."

이것은 2008년에 있었던 어느 대담에서의 일부분입니다. 여기에서 예술을 `잉여(나머지, 쓸모없는 일)`로 본 나의 견해는, 일반적으로 예술이 갖는 시대착오성이나 현실과 유리된 취약성의 측면에서 공격당할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점을 애써 강조한 것은, 여전히 예술은 당 시대의 낙후되고 일반화된 통념에 맞서 새로운 감각을 자극하고 촉발시키는 새로운 것이어야 한다는 믿음과 확신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이것은 예술 일반에 꼬리 붙은 창조성이나 개성, 표현 등의 오래된 통념에 대한 거부이고 포기이자, 나아가 그에 배제되어 왔던 나머지(잉여)에 대한 것에의 간섭과 관여의 부분에서 그 가능성을 본다함을 뜻합니다.

그런 결과로서의 나의 작품들은 대체로 사소하거나 연약하고 빈약해서 초라하고 누추하기조차 합니다. 나의 작품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머무르는 것이거나, 흔히 말하는 대중과의 소통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과격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보통 얘기하는 예술의 소통 기능을 믿지 않습니다. 관객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의 작품 앞에서 관객이 열광하리라고는 애당초 꿈도 꾸지 않습니다. 나는 왜 그런 무모한 일을 자초하는 걸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나는 작품을 새로운 감각이 출현하고 경험되는 사건의 장(場)이나 계기 정도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들이 꽤 귀엽고 소중하게 느껴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왜냐하면 작품을 하는데 있어서 그 제작과정이나 작품의 일부를 통해서 나를 자극하는 새로운 무언가가 경험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작품을 한다는 것은 여전히 특수하고 각별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매 순간 사건과도 같은 촉발된 감각의 연속 즉 `감각의 덩어리`인 것으로 다른 무엇보다도 이에 깊은 관련을 갖는 것, 아니 그 자체라고 봅니다. 이런 이유에서 나는 `그림은 아주 좋은 것이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일은 작품을 하는 데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나는 그러한 새로운 감각이 출현하고 경험되어 의미 있게 다가오는 무엇인가가 있다면 그 일체의 것을 의미 있는 예술적 행위, 즉 작품의 품격과 위상을 갖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나아가 현 시대에 예술이 필요하고 의미 있는 것이라면 전적으로 그러한 이유에서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작품을 행하는 데에 있어서 새로운 감각의 출현을 의식하느냐 못하느냐 또는 그 생경한 것을 스스로 의미화, 내재화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일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모든 사람은 예술가이다`라며 보이스(J. Beuys)가 제창한 열린 `광의(廣義)의 예술` 개념에 동의합니다. 예술이 어디 따로 있습니까? 예술 그 자체로서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예술이 인간에게 있어서 어떤 의미로 기능하는가라는 문제가 무엇보다도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그런 점을 도외시하는 예술가가 있다면 그를 혐오합니다. 그림 그리기뿐만 아니라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우리는 그러한 점을 부지런히 간파하고 이의 사실이나 경험에 대해 타인과 대화하고 이를 만방에 알리기를 주저하지 말고 용감하게 행해야만 된다고 생각합니다. 허구영 목원대학교 미술학부 서양화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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