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이었다. 신문 사회면에 `보신용으로 팔려간 개가 13일 만에 주인집으로 되돌아왔다`는 이런 기사가 났다. 복 전 날 가평에서 두 마리의 개를 서울의 수집상에게 팔았다. 그 중의 한 마리가 수십 ㎞ 떨어진 가평집을 찾아왔다. 그간 제대로 먹지 못해 뼈만 앙상한 모습이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발바닥이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주인 할머니를 찾기 위한 염원으로 그간 셀 수 없는 고통을 겪은 터였다. 어떻게 그 먼 곳까지 찾아왔을까. 불가사의한 일이다.

나는 여기서 우리 인간을 생각해 본다. 이웃과의 보이지 않는 경쟁은 결국 윤택한 삶을 위한 한 방편이 아니겠는가. 남보다 앞서기 위해 죽자 살자 뛰고 달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개가 자신에게 밥을 주던 할머니를 찾기 위해 사선(死線)을 넘어 달려온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은 크고 작은 것을 성취하면서 살아간다. 많게 얻은 사람, 적게 얻은 사람, 누구도 자신의 성취에 만족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한다. 결국에는 다 버리게 된다. 늙고 병들어 죽는다. 그렇다, 우리가 이 세상 소풍 끝내고 돌아갈 때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오직 마음 하나뿐이다. 할머니한테 가면 아무 걱정 없이 밥을 실컷 먹을 수 있다는 일념으로 다시 돌아온 개가 어찌 보면 매우 지혜로워 보인다. 그 이상은 바라지도 않는다.

우리가 안락감, 만족감, 행복감을 느끼는 것은 어떤 때인가. 물질적인 것인가, 정신적인 것인가. 아마도 마음에 찍힌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진들과 교우할 때일 것이다. 의식이라는 필름에 찍혀진 그림과 교우할 때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더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하여 처절할 정도로 자기 몸을 혹사시킨다.

날마다 쓰레기를 버리면서도 정작 `쓰레기 매립장`이 내 집 근처에 들어오는 것은 용납하지 못한다. 죽으면 화장하겠다고 다짐한 사람들이지만 `화장장, 장례식장, 납골당`이 내 마을에 들어오는 것은 결사 반대하는 이중적 심리 구조를 갖고 있다.

좋든 싫든 이기심과 그에 따른 생존경쟁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 사회의 요구와 적당히 타협하는 지혜를 발휘하는 것도 미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국적도 없이, 비자도 없이 방랑자로 살아가는 구름의 고매한 인격을 닮을 일이다. 하늘의 자식으로 바람같이 물같이 살아가는 구름처럼 살다 갈 일이다. 문희봉(시인·전 대전문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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