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한반도는 열강의 놀이터였다. 청나라와 일본, 러시아는 동북아시아 패권을 놓고 우리 앞마당에서 땅뺏기를 했다. 지도자들은 무지했다. 국제 정세에 어두웠고, 열강 눈치를 보느라 제 구실을 못했다. 1882년 임오군란을 시작으로 갑신정변, 청일전쟁, 아관파천, 러일전쟁이 잇달아 터지면서 권력은 청에서 러시아로, 다시 일본의 손아귀로 들어갔다. 그들에게 조선의 안위나 백성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무력한 지도자들은 역사의 변곡점 마다 특정 국가에 의존하려 했지만 돌아온 건 망국(亡國)의 비애였다.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 고종은 불난 데 기름을 부었다. 서로는 개인적 원한에다 정치적 이해관계가 맞물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개인적으로도 비참한 말로를 맞았다. 청나라에 기대려던 명성황후는 일본 낭인에게 난자당한 뒤 불살라져 흔적조차 찾지 못하는 운명이 됐다. 일본을 후원 세력으로 믿었던 대원군은 청나라를 몰아내려다 3년 동안 감금되는 굴욕을 겪었다. 아관파천 뒤 러시아 공사관에 머문 고종은 그 대가로 온갖 이권을 고스란히 내줬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적어도 오늘의 우리가 그런 꼴이다. 교훈을 얻기는커녕 과거를 망각한 탓이다. 2017년 새해 벽두 한반도를 둘러싼 환경은 120년 전보다 더하면 더했지 조금도 나아 보이지 않는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탄핵절차가 진행 중인 가운데 우리의 외교 리더십은 장기간 공백 상태다. 이 틈에서 한반도 주변 4강인 미국과 중국, 일본, 러시아는 치열한 각축을 벌이고 있다. 말이 좋아 외교전이지 내용을 들여다보면 총성 없는 전장(戰場)과 다를 게 없다.

당장 내일 취임하는 트럼프의 미국이 달라졌다. 트럼프는 벌써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지렛대 삼아 시진핑(習近平) 협공에 나섰다. 우리 외교안보의 환경 변화가 불가피할 것임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실제로 메티스 국방장관 내정자는 "북한에 대한 군사대응도 하나의 옵션"이라고 밝혔다. 북핵 해법 중 하나라지만 우리 입장 따위야 별다른 고려 대상이 아니라는 데 심각성이 있다. 국가 이익을 최우선시 하려는 일련의 움직임에서 을사늑약의 빌미를 제공한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떠올린다. 당시 미국은 필리핀에 대한 식민지 통치를 인정받는 대가로 대한제국 외교권을 일본에 넘겼다.

중국의 위협은 보다 현실적이다. 사드 보복이 구체화되면서 전기전자와 철강·자동차·관광· 화장품 같은 업종에 불똥이 튀었다. 보복은 드라마나 공연예술 등 문화에 이어 스포츠로까지 번져 우리 축구 선수들의 영입을 꺼리고 있단다. 그런 한편 시 주석은 다보스포럼에서 보호무역주의에 대해 "스스로를 어두운 방에 가두는 행위"라고 비판하며 자유무역의 수호자를 자처했다. 한국의 정치 상황을 최대한 활용해 어르고 달래겠다는 술수다. 소녀상의 독도 설치를 놓고 일각에서 감상적으로 접근하면서 일본의 입지를 되레 넓혀주는 결과를 가져온 것도 되새길 일이다.

지도자의 절제된 언행과 비전이 절실한 상황이다. 한반도를 삼킬 듯 넘실대는 4각 파고를 관리하고, 해법을 제시해달라는 얘기다. 대한민국 외교가 미로를 헤매고 있지만 대권주자들은 권력 놀음에 빠져 국익에 치명타를 입히는 발언과 행적으로 우려를 키우고 있다. 안보의 최후 보루인 사드만 하더라도 실무적 배치 작업을 진행하던 중 야권 유력후보의 말 바꾸기와 국회 비준 요구로 난기류에 빠졌다. 얼마 전 굴욕 외교로 비난을 산 더불어민주당 방중 의원단이 사드에 대해 국회로 공을 넘기라고 한 것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사드 배치 같은 중대한 안보 현안에 있어 여야가 따로 놀고, 정파 이익이 달라져서는 안 된다. 정치권에 협치(協治)가 필요하다면 바로 이런 경우다. 외교 리더십이 절벽 앞에 놓인 상황이기에 지도자들이 더욱 중심을 잡고 머리를 맞대 활로를 찾아야 한다. 폭우가 쏟아지면 비닐 우산이라도 펼쳐야 하는 법이다. 대권주자들은 이제라도 안보의 탈정치를 선언하기 바란다. 120년 전처럼 한반도가 패권주의 먹잇감으로 전락하는 걸 두고 보지 않겠다면 말이다. 송신용 취재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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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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