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리·불의한 국가 권력 국민 절망·분노 촛불 분출 희망·위안 찾는 봄 고대

이번 생에서는 다시 맞을 수 없는 한 해가 시작되었다. 계획한 일들이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마음을 다잡아 본다. 그렇지만 경험이 주는 교훈은 삶이 의지대로만은 흘러가지 않는다는 슬픈 자각이다. 생각해보면 우여곡절 없는 삶도 지상엔 없다. 한 시절 오르막이 있었다면 머지않아 내리막이 있을 거라는 것도 예감만이 아닌 현실이었다.

이런저런 사회적인 이유들로 어수선했던 연말을 새해와는 떼어놓고 싶지만 달력만 바뀌었을 뿐 세상은 달라진 게 조금도 없어 보인다. 지리적인 위치가 그러하니 해마다 맞는 새해의 시작이 추운 한겨울이라는 사실도 새삼스럽다. 바깥이 추우면 추울수록 마음은 더 따뜻해져야 한다. 바깥은 그럭저럭 견딜 만한데 외려 안쪽이 더 춥다면 그건 더없는 안타까움이자 불행이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노릇을 바라보는 심정이 그렇다. 바깥보다 마음이 더 춥다. 나라도 국민도 어제보다는 좀 더 나은 쪽으로 방향을 잡아 나아가야 할 텐데 새해가 되어서도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우왕좌왕의 연속이다. 이 땅에, 이 나라에 태어나서 살고 있는 이들은 자신의 운명을 탓해야 할까. 대를 이어 지속되어 온 부조리와 부정과 불의들을 다만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감내해야 할까.

권리를 위임하면서 혹시나 하는 희망과 기대도 거기 섞어 넣었던 거대한 국가권력의 불온한 힘 앞에서 무력하기만 한 민중들이 촛불을 켜들었다. 촛불에 담긴 간절한 국민의 바람을 정부는 귀 막고 눈 감은 채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나라가 이 지경인데도 어떻게 권력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것에만 오로지 골몰하고 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인 저들의 빤한 거짓말에는 이젠 화조차도 나지 않는다. 그저 안쓰럽고 불쌍하다는 생각뿐이다.

권력의 그릇된 행태에 폭력적 항거를 하지 않고 가녀린 촛불 불꽃 하나로 자신들의 심정을 표출하는 민중들을 두고 시위 문화가 선진화되었다고 떠벌이는 정치인들을 바라보는 마음이 착잡하기만 하다. 폭력은 분노이지만 촛불 불꽃은 분노를 넘어선 절대 좌절과 깊이 모를 절망감의 표현이라는 걸 저들은 모르는 모양이다.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체하는 것인지.

없는 희망을 찾아서 촛불을 켜든 이들의 간절함을 위무해 줄 정의로운 힘은 이 땅에 없는 것일까. 때린 자도 지치고 맞은 자도 지치는 소모적인 싸움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 것일까. 전 시대의 유물인 이념논쟁과 지역감정으로 무장된 정치인들이 아직도 버젓이 버티고 앉아 있는 현실을 바꿀 만한 새로운 물결의 근원을 어디에서 찾을까.

인간과 생명에 대한 연민이 없는 자들이 이끌고 가는 사회의 전형적인 끝판이 바로 지금의 대한민국이다. 이처럼 참담한 실상을 두고 아무도 반성하지 않고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결국 현실에 대한 책임은 고스란히 애먼 국민들의 몫일 수밖에 없다. 국민의 손으로 선택한 정부이고 정권이다 보니 잘잘못을 따지려 든다면 자기반성부터 앞서야 하리라.

새해 첫 주말에 친구들과 만났다. 모두가 평범한 중년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 친구들과의 대화는 언제부터인가 자잘한 사생활이 주된 화젯거리였다. 이야기 중에 누군가가 나라 이야기를 문득 하려고 하자 그런 얘기 재미없다고 하지 말자며 일제히 손사래를 쳤다. 어느 누가 권력의 중심에 서서 이 나라를 이끌어가게 되더라도 지금보다야 더하겠느냐는 자조 섞인 절망을 끝으로 술잔을 들었다.

희망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기분이 이런 것일까. 밖에 나가 보면 오직 계절만이 진실을 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들이 인간이라면 한결같은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새해가 되었으니 머지않아 봄이 올 테고, 그러면 자연은 또 그 섭리에 따라 온몸으로 봄을 새길 텐데, 길 위에서 촛불을 켜든 추운 마음들은 무엇으로 위안 받을 수 있을까.

봄이 왔지만 봄 같지 않은 봄을 맞지 않기를 남은 겨울 동안 빌고 빌 밖에. 추운 마음속에 켜 든 촛불의 의미가 결코 헛되지 않기를.

이태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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