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까지도 법을 공법과 사법으로 구별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는 인간의 생활관계를 법적인 관점에서 사법적인 영역과 공법적인 영역으로 구별하는 태도에 우리가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근자에는 양자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개인이 자기의 법률관계를 자유로운 결단에 의해 스스로 형성해 나아가도록 보장하는, 이른바 `사적 자치의 원칙`이 적용되는 영역을 사법이 지배하는 영역으로, 그렇지 않은 법의 분야를 공법의 영역으로 나누는 견해가 유력하다. 민법은 그러한 사법 중에서도, 우리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권리주체로서 법률생활에 참여하는 한 그 적용을 피할 수 없는 일반사법으로서의 지위를 갖고 있다. 비록 일생을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말을 들으며 송사를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이 세상에 태어나 생존하는 동안에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이상 민법의 규율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일상적이고 사적인 생활관계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민법은 사법을 대표하는 법률이기 때문에 앞서 말한 사적 자치의 원칙이 가장 극명하게 관철되고 있는 법 분야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 민법은 제2조로 `신의성실`이라는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은 규정을 두고 있다. 제1항 `권리의 행사와 의무의 이행은 신의에 좇아 성실히 하여야 한다`, 제2항 `권리는 남용하지 못한다`는 규정이 그것이다. 일제에 의해 이식된 일본 민법을 적용받을 수 밖에 없었던 이른바 `依用민법`의 시대를 거쳐 해방 후 우리 손으로 민법을 제정·시행하기까지에는 적지 않은 세월과 노력이 필요했는데, 흥미로운 것은 우리 민법의 입법자들은 그 입법의 초기단계에서부터 의용민법과는 달리 신의성실의 원칙을 명문으로 규정하려는 의지가 확고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민법 제2조인 셈이다.

사적 자치의 원칙이 적용되는 민법의 영역에서, 그것도 첫머리에 권리행사와 의무이행을 신의성실의 원칙에 따라 해야 한다는 일반조항을 두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어찌 보면 당연한 선언인 것 같지만 한편으로 과거 전체주의가 세계를 뒤흔들던 시절 신의성실의 원칙이 강조됐던 역사적 경험을 떠올리면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동안 축적되어 온 우리 판례와 학설을 통해 신의성실의 원칙은 재판과정에서 당사자의 의사를 해석하고 분쟁해결에 형평을 기하며 불완전한 법조항을 보충하는 등 재판규범으로서의 소명에 충실히 응해왔다는 점이다.

신의성실의 원칙에서 말하는 신의와 성실이란,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결코 다른 뜻일 수 없다. 그것은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고 의무를 이행함에 있어 다른 사람의 정당한 믿음을 존중하며 그 이익에 대한 적절한 배려를 베풀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고, 여기서 우리는 신의성실의 원칙이 우리 시민 모두의 행위규범으로서도 그 기능을 하고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게 된다.

모든 이들의 소망처럼 나라의 기강이 바로 서고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되기를 고대하면서 새해 첫머리에 신의와 성실의 원칙의 의미를 소박하게나마 되새기게 된다. 새로운 출발은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어야 한다.최지수 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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