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 엘리트 위주 수탈적 체제 공멸의 길 혁신·창조적 파괴 없인 지속 성장 어려워 권력 분산·공정한 시장경제 구축 최우선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핫이슈가 되었던 것 중의 하나는 당시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가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쌓겠다는 것이었다. 국외자가 느끼기에 두 가지 점에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첫째, 선거이다 보니 이렇게 허무맹랑하고 냉소적인 공약도 할 수 있구나. 그것도 미국에서도 선거라면 `저 하늘에 달도 따다 준다`고 하는구나. 둘째, 민주주의의 선진국인 미국이 불법 이민에 얼마나 초조했으면 이렇게 극단적인 공약을 하였을까? 하는 연민과 의문을 느꼈다. 그렇다면 트럼프는 왜 이런 공약을 하였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다음의 사례는 그 중의 하나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에 걸쳐 있는 노갈레스라는 도시는 담장 하나로 미국과 멕시코 두 나라로 나뉘어져 있다. 미국 주민은 평균 소득이 4만 달러도 넘지만 멕시코 주민은 소득수준이 그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인종과 역사와 문화가 같음에도 불구하고 두 지역의 극명한 대조는 오로지 제도의 차이가 지금의 격차를 유발하였음을 똑똑히 보여준다. 한밤중에 내려다본 한반도의 북쪽은 암흑천지이지만 남쪽은 눈부시게 빛난다. 이 엄청난 격차 역시 지리나 문화가 아니라 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모두를 끌어안는 포용적인 정치·경제 제도는 발전과 번영을 불러오고 소수의 엘리트만을 위한 수탈적이고 착취적인 제도는 정체와 빈곤을 낳는다. 포용적인 제도는 소수의 엘리트에게만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니고, 누구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고 유인을 제공한다. 국가가 실패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이런 유인을 말살하는 수탈적 제도가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최순실게이트`를 보며 "이게 나라냐?"라는 자조적인 물음에 많은 국민이 가슴으로 동의하며 자괴감을 느끼고 있다. 그런데 국가의 실패를 단지 지도자의 무지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오해가 있을 수 있다. 소수 엘리트가 수탈적 제도를 고집하는 것은 발전으로 가는 길을 몰라서가 아니라 포용적 제도가 불러올 창조적 파괴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창조적 파괴는 부와 소득뿐만 아니라 정치권력도 재분배하기 때문이다.

수탈적 제제에서도 어느 정도 발전할 수 있다. 생산성이 떨어지는 부문에 자원을 몰아줌으로써 한동안은 빠른 성장을 이룰 수 있다. 하지만 진정한 혁신과 창조적 파괴 없이 이뤄지는 성장은 지속될 수 없다. 옛 소련은 한때 미국을 제칠 기세였다. 1970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폴 새뮤얼슨은 1961년 그의 경제학 교과서에서 소련의 국민소득이 1984년이나 늦어도 1997년 미국을 제칠 것이라고 썼다. 1981년 판에서는 그 시기만 2002년이나 2012년으로 늦췄을 뿐 여전히 소련의 추월을 예측했다. 새뮤얼슨은 수탈적 체제 아래 이뤄지는 성장의 한계를 보지 못했던 것이다.

포용적 사회가 다시 수탈적 체제로 퇴행할 수도 있음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선거제도 존재와 시장경제체제 자체가 반드시 포용적 제도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권력이 분산되어 견제와 균형이 이루어지는 정치제도를 만들지 않고, 시장에서 공정한 경쟁의 장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포용적 제도는 성공하기 어렵다. 진정한 혁신과 창조적 파괴를 이루지 못해 결국 쇠락의 길을 걷게 된 로마제국이나 한때 지중해를 주름잡았던 강소국에서 이제는 한낱 역사박물관으로 전락한 베네치아가 대표적 예다.

역사의 진보나 발전에 필연이나 예정된 운명 같은 것은 없다. 역사의 흐름은 숱한 우연에 부딪혀 방향이 바뀌었고 앞으로도 또한 그럴 것이다. 번영의 길로 가려면 무엇보다 포용적인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제도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고 그 제도의 포용성이 지속적인 발전에 결정적인 요인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제도를 만드는 것은 정치이고 정치는 사람이 하는 것이다. 결국 한 나라의 진정한 가치는 사람에게서 찾아야 한다.

성선제 고려대 초빙교수·미국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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