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정말 자살을 시도 한 걸까.

술을 마시고 불콰해진 상태로 귀가한 할아버지가 말했다. 집 안에 주인이 들어왔으면 전부 나와서 인사를 해야지. 소, 돼지도 주인은 알아보는 법이다. 오늘 아침에 끓인 된장찌개는 소금이 너무 많이 들어갔다. 아침부터 짠 음식을 먹으면 하루 종일 입안이 텁텁해서 도무지 일을(일이라고 해봐야 경로당을 다녀오는 정도지만)볼 수가 없다. 마치 이 말을 하려고 태어난 사람처럼 그는 결연하게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의 대답은 한가지다. 죄송해요, 아버님. 배를 꾹 누르면 사랑해, 라고 말하는 인형처럼 누군가 엄마의 배를 꾹 누르면 저 소리가 나온다. 엄마는 그것이 술 취한 아버님을 대하는 맏며느리의 자세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아빠를 제외한 다른 식구들은 이런 상황에 대체로 여유로운 편이다. 저마다 각자의 방식으로 대응을 했다. 술이란 것이 폭발물과 같이 위험한 녀석이지만 굳이 뇌관을 건들지 않는 이상 시끄러운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그건 폭발물 앞에 선 인간의 기본 행동 방식이다.

폭탄을 향해 돌을 던지거나 근처에서 뛰어놀지 않는 이상 평화는 유지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마치 연극을 하듯 일정한 쪼로 그의 반성 요구형 연설에 반응해야했다. 그러나 그런 식구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빠는 늘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역할을 했다. 1947년생인 아빠는 한국전쟁을 아주 어린나이에 경험했다. 그래서 그런지 전쟁을 무슨 놀이쯤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매일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어 할아버지에게 돌진했다. 결국 피해는 주변 민간인들이 받는 다는 사실을 알아도 모른 채 하며 탱크처럼 밀고 나갔다. 자신을 무슨 돌격대쯤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맨 정신엔 서로 관심 없는 이성처럼 내외하다가도 술만 마시면 이날만을 기다린 사람들처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그것은 술과 맺은 두 부자의 굳은 약속처럼 어김없었다.

"이거 누구 신발이냐? 사람은 늘 뒤가 깨끗해야 되는 법이다."

그는 어떤 철학적 도그마라도 되는 마냥 확신에 차있는 어투로 얘기 했다. 식구들은 이미 해외순방을 마치고 돌아온 대통령 전용기 앞에 늘어선 간신들처럼 현관문 앞에 종으로 도열해 있었다. 할아버지의 말엔 내가 70년 넘게 살아봐서 잘 아는데…….라는 세월이라는 견고한 가치가 내포되어있었다. 신발의 주인은 줄곧 꼬리가 길다는 평을 듣는 셋째누나의 것이었다.

"죄송해요. 할아버지. 조심 할게요"

셋째는 듣기평가의 성우처럼 되도록 정확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애미는 술상 봐오고 나머지는 들어가 일봐라"

그는 조교에게 잔일을 시키고 연구실을 일별하며 생각을 정리하는 노교수 같은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할머니는 만성관절염을 앓고 있는 일 잘하는 비서실장처럼 조용히 가탈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네 안녕히 주무세요"

아직 이른 시간이었지만 가족들은 일제히 그랬으면 하는 마음으로 인사를 했다. 할아버지가 방으로 들어간 후 우리는 다음 막을 준비하는 배우들처럼 각자의 자리로 흩어졌다. 메인막이 내려오기 전까지 누구도 무대에서 내려오지 못한다. 그들은 그 사실을 짐짓 외면한 채 연극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코 끝나지 않는다는 것, 모두가 알고 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 마음대로 내려오지 못하는 무대, 그것이 가족이라는 제도였고 집이라는 사회적 공동체였다.

할아버지는 백발의 노인이다. 반면 눈썹은 송충이처럼 숱이 많고 짙은 흑색이었다. 게다가 오뚝한 콧날, 갸름한 턱선까지. 인물치레하나는 빠지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족 남자들의 유전적 특징이었다. 그리고 낮고 선 굵은 목소리까지 더해 정년퇴임한 교수 못지않은 풍모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콜라텍 같은 곳에 가면 인기가 보통은 아닐 것이다. 왜 그런 과장을 하는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젊어서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는 여자들이 대문 앞에 못해도 십리는 줄을 섰다고 했다. 할머니는 그런 여자들에게 소금을 한 되박 쏟아 부었다는 데, 그런 과장이 오히려 할머니를 더욱 초라하게 만들었다. 할아버지는 과거의 복잡한 치정경력이 지금으로 말하자면 취업 스펙쯤으로 착각한 듯 내심 뿌듯해했다. 그런 것들이 할머니로 하여금 이야기를 점점 극적으로 연출하게끔 만들었다.

할아버지의 술상 담당이자 집안의 맏며느리인 엄마는 아침에 끓여 놓은 비지찌개와 김치 따위를 올려놓으면서도 안주를 무엇을 놓나, 라고 혼잣말을 했다. 엄마는 밥상이든 술상이든 김치, 비지, 된장찌개 이렇게 3가지만 끓여 쓰리쿠션처럼 빙빙 돌려 내놓았다. 차리는 밥상을 보면 가족들의 섭생에는 전혀 관심도 없는 것 같은데 김치를 많이 먹어야 좋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엄마는 5형제 중 장남인 아빠에게 스무 살 꽃 같은 시절(시절만 그렇다는 얘기다)에 시집와 내리 딸만 셋을 낳고 8년 만에 나를 낳았다. 서른두 살에 네 번째 임신을 했을 때 또 딸일 것 같은 생각에 틈만 나면 배를 두들기고 일부러 넘어지기도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정도로 유산이 되지는 않는다는 걸 본인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축구로 따지면 할머니의 눈을 속이기 위한 할리우드 액션정도로 보면 될 것이다. 나 역시 더 이상 딸이 싫다, 낳고 싶어서 낳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만약에 또 딸이 나오더라도 부지깽이 따위를 드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대충 이런 뜻이었으리라. 어쨌든 나는 죽지 않고 누구보다 건강하게 태어났고 엄마는 할머니에게 처음으로 미역국을 얻어먹었다. 그때의 감격을 엄마는 훗날 이런 식으로 표현했다. 그때 네 불알이 얼마나 크던지 불알이 얼굴만 하게 보이더라. 다 큰 아들 앞에서 상스럽게 불알이라니 나는 그나마 자지가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렇게 할아버지가 얘기하는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 근 10년의 시간동안 네 번에 걸친 시도 끝에 태어났다. 참고로 나는 집안의 대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니 이 얼마나 부담스러운 일인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매번 약간의 익살로 부담스런 상황들을 벗어나고는 있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의문이다. 엄마는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 딸을 셋이나 낳은 죄인이라 그런지 늘 죄송합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은 표정으로 시 부모님을 대했다. 그것이 나를 더욱 부담스럽게 했다.

술상이 들어간 안방에서 할아버지는 비서실장을 옆에 두고 자신의 정책을 전달하고 있었다. 매일 동일한 내용이었지만 할머니는 여느 간신들처럼 고개를 과하게 주억거리며 호응을 해댔다. 주목할 만한 내용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첫째누나는 안방 문 앞에 팔짱을 끼고 서서는 부러 짜증을 유발하기 위해 듣지 않아도 되는 소음을 듣고 있는 사람처럼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기웃거렸다. 술상 운송 임무를 완수한 둘째누나와 엄마는 부엌 한구석에서 소곤거렸다. 아마 아빠가 어디에 갔는지 언제쯤 나갔는지 따위를 얘기하며 불안에 떨고 있을 것이다. 아직 중학생인 셋째누나는 아빠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는 점과 할아버지가 술에 취해 있다는 점이 내심 걱정되었지만 그렇다고 지금 본인이 그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미래가 결코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바뀌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TV를 켤 모양으로 소파에 앉아 무릎을 가슴까지 끌어올렸다. 나는 모든 상황을 지켜본 후 내 방으로 들어갈 채비를 하였다.

장손이라고 불리는 나는 몇 가지 특권을 누렸다. 그 중 하나가 독방이었다. 자그마치 여덟 식구가 사는 집에 방이 세 개인 점을 감안하면 내가 생각해도 부당해 보이는 처사였지만 나는 아무 말 없이 그 특권을 수용했다. 대식구가 좁은 집으로 이사를 왔으니 가장 큰 문제는 방 배정이었다. 아빠는 특유의 막무가내로 일을 깔끔하게 처리했다. 안방은 두 노인네, 작은방은 장손, 그리고 나머지 중간 방 하나는 계집애들 셋. 끝. 누나들은 권력자의 마음을 돌려보고자 평소 볼 수 없는 친분을 다소간 유지했으나 상식적인 대화를 거부하는 아빠 앞에서 별 수 없었다. 그리고 두 번째 특권은 나만이 이 우스꽝스러운 연극무대에서 언제든 퇴장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누구도 나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은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은 행여나 내가 잘못된다면 이 집안의 대가 끊기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들을 적절히 이용하며 살아왔다. 금방이라도 폭력이 난무할 것 같은 무대도 내가 나서면 대부분 그만두는 시늉이라도 했다. 그것이 이 집 장손의 힘이고 권력이었다.

나는 무대에서 퇴장하기에 앞서 무대를 톺아봤다. 첫째는 술이 원수라느니 술만 마시면 다들 개가 된다느니 중얼거렸다. 그러나 정작 본인이 뭐 마려운 개 마냥 안절부절이었다. 엄마는 세 딸 중에서도 유독 둘째와 죽이 잘 맞았다. 계속해서 아빠의 행적에 대해 대화를 주고받는 꼴을 보니 아무래도 아빠 역시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이 분명한 듯싶다. 셋째는 힐끔 힐끔 눈치를 보며 TV의 볼륨을 높였다 낮췄다, 하며 동물 분장을 한 개그맨들이 나오는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다. 언제 봐도 참 속이 없는 동물이다. 그래도 언제 엄마의 손바닥이 등짝을 후려칠지 모른다는 긴장감에 몸을 한껏 움츠린 체였다.

무대에서 벗어나 독방으로 들어온 나는 문득 훗날 벌어질 할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죽을 고비를 크게 한 번 넘겼다고 했다. 술에 취해 길을 걷던 중 두 대의 소달구지 사이에 껴서 엉치뼈를 크게 다쳤고 간신히 살아났다. 운이 좋았다고 했다. 할머니는 그때의 상황을 영웅담처럼 늘어놓곤 했다. 나는 소달구지 사이에 껴있는 사람의 모양새를 상상해 보았지만 쉽게 떠오르진 않았다. 할머니는 이야기 끝자락에 매번 여튼 술이 웬수여, 너는 커서 술 같은 건 쳐다보지도 마, 라는 말했다. 그러나 끝은 항상 너도 같은 최씨인 걸 그 피가 어디 가겠냐, 라고 뇌까렸다.

나는 오디오를 켰다. 라디오 헤드였다. 라디오 대가리? 라고 잠깐 생각하며 피식 웃어 보았지만 정말로 웃음이 나오지는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밖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에 눈을 떴다. 책상의 탁상시계 시침이 11시 코에 닿아있었다. 오늘도 일찍 자기는 글렀네, 나는 기지개를 켜며 혼잣말을 뱉었다. 그때 밖에서 내 이름이 들렸다. 다소 격양된 할아버지의 목소리였다. 문을 열고 거실로 나가자 식구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다. 환한 거실에 눈이 부셔 그 표정들을 정확히 읽을 수는 없었다. 나는 천천히 할아버지로 보이는 형체 앞으로 걸음을 옮기며 자다 깬 사람처럼 눈을 비벼댔다.

"부르셨어요?"

중학생이 된 후 상당한 공부량으로 고통 받고 있는 듯한 장손의 애처로운 모습을 그 한마디로 모두 표현했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할아버지는 잔 겨? 요즘 공부하느라 많이 힘든가 보구만, 얼른 들어가 더 자라, 우리 집안은 너밖에 없다 등의 격려를 등에 붙여 들여보낼 것이다. 그러나 예상 밖의 문장이 내 귓속으로 들어왔다. 너 이리 앉아봐라, 술상 앞을 가리켰다. 지난번 추석 때 먹고 남은 두꺼비같이 검고 두꺼운 모듬전이 술상에 놓여 있었다. 아마 둘째의 작품일 것이다. 할아버지는 나에게 소주를 한잔 따르라고 지시한 후 단숨에 소주를 들이켰다. 그리고 나를 포함한 식구들을 향해 이렇게 얘기했다.

"이제부터 너희 아버지 최중만이는 이제 내 아들이 아니다! 그렇게들 알아라"

내 아들이 아니라니, 이 얼마나 유치하고 진부한 표현인가, 라고 생각했지만 순간 제법 심각한 표정을 지어주었다. 나를 제외한 식구들은 돌방상황에 당황한 신인연기자처럼 어색하게 눈빛이 허둥거렸다. 바로 그 순간 정말 잘 짜인 연극처럼 아빠가 비틀대며 현관문을 열었다. 기막힌 타이밍 이었다. 정말 양반은 아닌 양반이었다.

이누이트족이 눈(雪)의 종류를 다양하게 구분해내듯 나 역시 아빠의 술 취한 행동과 관련하여 나름의 구분법을 갖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봤을 때 그냥 만취한 것이지만 나는 그가 얼마나 마셨는지 기분은 어떤지 몇 시간짜리 주정을 동반한 취함인가 까지 대략 예측 할 수 있다. 보통 평소에 쌓였던 불만을 늘어놓고 싶을 때 저렇듯 작위적으로 비틀대고는 한다. 그는 취하지 않았다. 주량보다 조금 더 마시긴 했지만 갓 태어난 송아지새끼마냥 너털거릴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현관문을 열자마자 빠른 속도로 마주 앉아 있는 나와 할아버지 그리고 술상의 안주까지 순식간에 훑어보며 상황을 파악하고 자신의 위장취기가 들킬세라 더욱 심하게 비틀댔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미닫이문을 드르륵 열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한 일보 후퇴였다.

참, 방 배정에 있어 빠진 부분이 하나 있다. 부엌이었다. 우리 집 부엌은 낮에는 부엌의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고 밤에는 부부의 침실로 활용하는 이모작 시스템이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우리 집은 대가족이다. 머리만 여덟 개 팔다리 합이 무려 서른둘이다. 그러나 방은 오직 3개. 엄마와 아빠는 곧 방이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들은 부엌에 살고 있다. 그러나 오해마시길 이 집은 쓸모없이 부엌이 거실보다 훨씬 넓다. 불투명유리를 부착한 미닫이문 하나가 사생활을 보호하고 있는 것만 빼면 나머지 인권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 쾌적했다. 싱크대와 식탁과 냉장고가 좌측에 배치되어있고 그 두 배 정도의 공간이 맞은편으로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옷장을 비롯해 소파에 전기장판까지 갖출 건 전부 갖춘 방이었다.

부부의 금슬을 보아서 그럴 일은 별로 없겠지만 인간이란 동물이 예측하기 힘든 행동을 가끔 하기도 하니 혹 새벽에 냉장고에 들어있는 물이라도 한잔 마시려면 혹시 코고는 소리 외에 다른 소리가 들리지는 않는지 귀를 대보아야 하는 번거로움, 또 자고 있는 두 사람을 옆에 두고 금고를 털 듯 냉장고를 열어야 하는 불편함만 빼면 그럭저럭 괜찮은 방이었다. 우리는 그곳을 부엌방이라 불렀다. 이집으로 이사 오기 전에 엄마는 입버릇처럼 부엌데기 주제에, 라는 말을 자주 했다. 그래서 그런지 엄마는 진짜 부엌데기가 되었다.

사실 나 혼자 독방의 특혜를 누리게 된 것도 엄마가 진짜 부엌데기가 된 것도 순전히 아빠의 공로 덕분이었다. 사랑방까지 합해 방이 5개나 되었던 집과 전답을 그 자리에 아파트를 짓겠다던 사내들에게 팔아 버린 것도 아빠였고 그 돈으로 허름한 3층 건물을 덜컥 사 버린 것도 아빠였다.

아버지는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를 도와 농사를 지었다. 식구들이 늘어갈수록 논밭은 줄었고 쌀값도 포도값도 예전만 못했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느지막이 집근처 유리공장엘 취직을 했다. 제법 큰 규모의 유리공장이었다. 하루에 12시간 2교대의 고된 노동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커다랗게 코를 골며 잠들어 있는 그와 종종 마주치곤 했다. 그 역시 자식을 넷이나 낳은 죄인이라 묵묵히 노동을 견뎌야 했다. 아빠는 월급을 받는 월말이면 라면 한 박스와 누런 종이에 쌓인 통닭을 한 마리 들고 왔다. 다리는 언제나 내 몫이었지만 나는 사실 닭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때 나는 아빠가 조금 안쓰럽거나 가끔 대견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렇게 아버지의 농공으로 생활을 이어오던 우리 집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리던 신도시 붐이 우리 동네까지 온 것이었다. 경운기나 트랙터 따위만 드나들던 조그만 동네에 고급 승용차와 화이트칼라들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한두 채씩 빈집이 생겼다. 곧 커다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다고 했다. 하루에 적게는 수천에서 많게는 수십억까지 보상금이 왔다 갔다 했다.

적지 않은 농사를 짓고 있던 우리 집 역시 상당한 보상금을 받았다. 그 당시 집에는 천만 원짜리 수표가 무슨 누룽지 긁어놓은 것처럼 흔하게 돌아다녔다. 하루가 멀다 하고 생전 처음 보는 친척들이 찾아왔다. 통이 큰 할아버지는 그렇게 찾아오는 이들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하고 다만 몇 푼씩이라도 쥐어서 보냈다. 가끔은 백화점 종이가방에 현금을 꽉 채워 돌려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외 대부분의 보상금은 아빠가 관리를 했다. 아버지는 법적 상속자들인 자신의 동생들에게도 적지 않은 돈을 보상해주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수중에 유리병이나 볍씨대신 지폐가 무더기로 손에 들어왔으니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고 말 그대로 허둥지둥 이었다. 우선 집이 팔렸으니 당장 살 집이 필요했다. 평생을 한 동네에서 살아온 할아버지와 아빠는 멀리 떠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주변 땅값은 오를 때로 올라 내 맘대로 오줌을 갈기던 그 예전의 논밭이 아니었다. 그게 아니면 전부 아파트가 들어설 재개발 예정지였기 때문에 매입 자체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8명이나 되는 대 식구가 이사 갈 집은 생각보다 빨리 구해졌다.

바로 옆 동네였지만 개발 붐 조차 빗겨간 외진 곳에 조그만 3층 건물이 하나 있었다. 1층은 식당으로 2층은 월세 방 두 개, 3층은 가정집으로 이루어진 그 건물은 50대 초반 과부가 주인으로 있었다. 1층 식당에 손님이라고는 의리로 오는 친구들 몇몇이 전부였고 2층 월세 방은 세입자가 끊긴지 수년은 되었다. 주인여자는 하루라도 빨리 이 쓸모없는 건물을 처분하고 싶어 했다. 그런 주인여자에게 아빠는 놓칠 수 없는 호구였다.

아빠는 그 즈음 그 식당에서 자주 술을 마셨다. 그 집의 주 메뉴는 오리 탕이었다. 그렇게 아빠는 빨간 고춧가루를 뒤집어쓴 벌거벗은 오리를 가끔 집으로 싸들고 왔다. 형편없는 맛이었지만 아빠만이 최고라며 추켜세웠다. 아마도 공짜로 받아온 모양이었다. 장사도 아주 잘 된다며 인수를 하게 되면 큰 이문을 남길 것이라 말했다. 그러나 그가 가는 날만 장사가 잘 되는 이유를 아빠만 알지 못했다. 그렇게 그 귀곡 산장 같은 3층 건물을 시세보다 높은 가격을 주고 매입했다.

아빠는 그 무렵부터 각진 턱을 들고 걷기 시작했고 자주 술을 먹고 으스댔다. 결국 우리는 맛없는 오리 탕을 몇 번 더 먹고 나서 이사를 왔다. 우리가 이사 온 직후 식당은 예상대로 문을 닫았고 빈 식당은 가끔 나의 놀이터로서 활용될 뿐이었다. 아빠는 그 후 다니던 유리공장을 그만두었고 엄마 역시 10년간 근무하던 금성전자를 그만두었다. 엄마는 그 후로도 내가 만들어 봐서 잘 아는데 TV건 냉장고건 금성제품이 제일 튼튼해, 라며 누가 삼성제품을 칭찬이라도 할라 치면 상호가 몇 해 전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이 금성의 중역이라도 되는 냥 전자제품은 금성이야 금성, 이라고 손 사레를 치며 달려들곤 했다.

그 후 수중에 돈이 떨어질 때까지 아빠는 외지에서 온 부동산업자들과 어울려 다녔다. 그들은 헐값에 토지를 사들여 아빠와 같은 호구들을 상대로 몇 배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되팔아 이윤을 남기는 진정한 장사꾼들이었다. 아빠는 본인을 사장님이라 칭하며 하루에도 몇 번씩 구름위로 띄워주는 그들을 엄마보다 좋아했다. 아빠는 아마 돈의 참 맛을 그때 알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결국 시세보다 곱절도 넘는 금액으로 전라도 어느 시골의 야산의 땅문서를 하나 얻고 그들과는 이별했다. 그들은 만나면 죽지 못하는 의형제였지만 일이 끝나자 냉정하게 돌아섰다. 사랑은 늘 그런 식으로 끝이 난다. 한쪽이 완전히 무너진 후. 더 많이 잃은 쪽이 더 많이 아파하며 그렇게 끝이 난다.

그 소식을 들은 출가한 할아버지의 나머지 아들들이 찾아왔다. 그 돈이 어떤 돈인데, 그런 돈을 어떻게 등등의 소리를 지르곤 했고 그 후 아예 발길을 끊었다. 아빠는 그 이후 할아버지와 마주치길 꺼려했고 할아버지 역시 아빠를 모른 체했다. 그런 점에서 할아버지의 절교 선언이 그리 놀라운 일만은 아니었다.

그 후 하늘을 찌르던 아빠의 턱은 다시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그야말로 일장춘몽이었다. 아빠는 전에 살던 집터에 아파트를 올리는 공사 현장의 경비 일을 시작했다. 엄마 역시 다시 TV를 조립하러 나가야 했다. 할아버지는 그 즈음부터 제사라도 있다 치면 나를 옆에 앉혀놓고 조율이시니 홍동백서니 하는 청기백기게임 만큼이나 재미없는 것들에 대해 진지하게 설명해댔다. 뿐만 아니라 틈만 나면 족보를 펴 놓고 인간이 무슨 식물도 아니고 뿌리를 알아야 한다며 시조와 조상들에 대해 읊어댔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로 결국 할아버지와 아빠의 무대는 두 개로 갈라졌다. 보통 둘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다. 상종을 안했다는 편이 더 맞겠다. 그러나 오늘처럼 두 주인공들이 술을 마시고 무대에 등장할 때는 애드리브가 난무했다. 둘째와 엄마가 부엌에서 소곤거리던 것도, 첫째가 온 집안을 범퍼 카처럼 왔다 갔다 하며 불안해하던 이유도 두 주인공의 조악한 연극에 조연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불편함에 따른 행동인 것이다. 나는 잠재적 권력자로써 둘의 충돌을 중재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그것이 다른 식구들이 나의 특권을 인정할 수밖에 이유이기도 했다.

아빠는 비틀거리며 거실에 앉아있는 할아버지를 투명인간 취급하며 두 번의 시도 끝에 부엌방 문을 열고 들어갔다. 우리 집의 두 번째 무대에 막이 오르는 신호였다. 아빠의 등장을 관객처럼 지켜보던 가족들은 아빠의 무대에 불이 켜지자 분주하게 눈을 굴리기 시작했다. 부산 갈매기~ 부산 갈매기~ 라며 부산은 한 번도 가보지 못했으면서 늘 부르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영감 늦었으니 우리도 얼른 들어가 잡시다.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소매를 잡고 얘기했다. 네, 할아버지 얼른 주무세요. 붙임성 좋은 둘째가 할아버지의 팔짱을 끼며 아양을 떨었다. 할아버지는 못이기는 척 그 둘을 따라 일어섰다. 할아버지가 들어간 후 첫째는 적개심에 불타는 진돗개처럼 부엌방문 앞에서 으르렁 거렸다. 아이고, 아이고, 참, 이런 따위의 감탄사를 마치 전투력을 증폭시키는 주문처럼 외우고 있었다.

"언니! 일루와 왜 거기 가서 씩씩대고 있어? 뭐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러고 있으면 뭐가 달라져?"

셋째는 한심하다는 태도로 첫째에게 말했다.

"뭐 이년아! 쪼그만 게 뭘 안다고. 넌 방에 들어가 있어!"

첫째가 쏘아보며 말했다. 셋째 누나는 4남매 중에 진짜로 제일 작았다. 학교에서도 늘 1번 아니면 2번을 독차지 했다. 실제로 쪼그만 년이었던 셋째는 자존심이 퍽 상했는지 백날 그래봐라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나, 겁나서 한마디 뭐라 말도 못하면서, 라고 조롱하듯 말하곤 방으로 들어갔다. 첫째는 아우 진짜! 내가 집을 나가던지 해야지 이놈의 집구석 지긋지긋해. 혼잣말도 아니고 누구 들으라고 하는 것도 아닌 애매한 데시벨로 말하곤 소파에 팔짱을 끼고 주저앉아 부엌방을 쏘아보았다. 그때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부엌방 문이 열렸다. 아빠는 우선 내 눈치를 보았고 첫째를 향해 묘한 미소를 지었다. 엄마는 평소 우리에게 아빠 술 취했을 때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라고 늘 당부하곤 했다. 엄마는 아빠의 뒤에서 첫째에게 레이저를 쏘았다. 아빠는 이제 비틀대지 않는다. 이놈의 계집애들 다 나와 봐. 아빠는 아직 치워지지 않은 할아버지의 술상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며 말했다. 방으로 퇴장했던 셋째 역시 첫째를 째려보며 나왔다.

"너 지금 뭐하는 짓이냐! 술을 처먹었으면 곱게 자야지 이 집안에 어른이 너밖에 없냐!" 손가락질을 하며 할아버지까지 무대로 나왔다. 이제 본격적인 막이 오른 것이다. 오늘의 큐사인은 첫째가 준 것이었다.

"내 새끼들 교육시키는 거니까 노인네는 신경 쓰지 말고 들어가 주무 세요"

아빠는 조용히 말했다.

"뭐? 이놈의 새끼가. 그런 너는 누구 새끼냐!"

할아버지는 뺨이라도 한 대 갈길 듯 손을 높이 들며 말했고 아빠도 벌떡 일어섰다. 그 바람에 술상이 엎어졌다. 첫째는 큰소리로 울음을 터트렸고 둘째는 아빠를, 셋째는 할아버지 앞을 가로 막으며 아빠가, 할아버지가 참으세요, 라고 각각 소리쳤다. 엄마는 아빠의 소매를 잡고 부엌방 쪽으로 당겼다. 목덜미 부분이 쭉 늘어나면서 티셔츠 속에 감춰졌던 하얀 어깻죽지가 헤벌쭉 드러났다.

나는 가끔 바로 앞에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 멀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때도 그랬다. 순간 꿈을 꾸는 듯한 묘한 기분에 빠졌다. 소리들은 점점 작아지고 있었고 필름이 늘어난 영화처럼 눈앞에 사람들의 행동이 점점 느려졌다. 여기저기서 시끄러운 소리들이 비빔밥처럼 비벼지고 있었다. 그때 나는 인간은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했다. 그냥 파도에 실려 어디로든 멀리 쓸려가고 싶었다. 그러나 나 역시 어디로든 갈 수 없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맑고 투명한 종소리처럼 유리창이 와르르 깨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그 소리의 진원지로 고개를 돌리며 비현실의 세계에서 깨어났다. 엄마였다. 뱀술과 인삼주 따위가 석고상처럼 앉아 있던 어른 키만 한 장식장의 유리가 깨져있었다. 나는 아빠가 뭘 또 집어던졌나 하고 생각했으나 예상 밖으로 범인은 엄마였다. 엄마의 손등에서 피가 뚝 뚝 눈물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맨손으로 유리창을 깬 것이다. 왜? 엄마가 왜. 다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씩씩 거리고 있는 엄마를 쳐다보고 있었다.

엄마는 우리 집에서 푼수를 담당했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랬다. 비록 장식장이 많이 낡아 크게 부담은 없었겠지만 이처럼 강렬하게 두 부자에게 도전할지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적어도 엄마는 그럴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나는 엄마의 그런 눈빛을 본적이 없다. 엄마는 우리 집에서 가장 수동적 캐릭터를 갖고 있었다. 먼저 질문하는 경우는 식사 하셨어요? 정도가 기억날 뿐이다. 그런 엄마가 어떤 사고를 갖고 이런 사고를 쳤을까? 고등어의 몸뚱이 살을 한입 베어 물고는 애이 역시 생선을 머리가 제일 맛있어 호호호, 라며 익살을 부리던 그 푼수 엄마가 아니었다. 나는 드디어 엄마가 본색을 드러냈다고 생각했다.

아빠의 무대에서 퇴장해서 주인공이 된 엄마를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환호했다. 엄마는 다른 형식으로 본인의 존재를 드러내고는 했다. 가령 늘 자신이 부엌데기라고 말했지만 사실 부엌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아빠가 진밥은 먹지 않겠다며 매번 식탁을 떠났음에도 엄마는 이레에 한두 번은 보란 듯이 진밥을 올려놓았다. 반찬은 종류가 다름에도 신기하게 같은 맛을 냈고 냉동실을 열면 작년인지 재작년 인지도 모를 명절음식들이 도끼가 되어 발등을 위협하고는 했다. 이 모든 행동이 지금의 혁명을 위해 숨겨온 정치적위장이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하마터면 박수를 칠 뻔 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했다. 손에 난 상처도 생각보다 깊지 않아 붕대 하나면 충분했고 결정적인 것은 엄마는 한동안 자신에게 집중되어있는 식구들의 시선을 이겨내지 못했다. 그만 좀 하세요! 이제 그만 하세요, 그만하시고… 명령형 어조는 점점 권유형 으로 사그라졌고 그나마 같은 말만 반복하다가 그만 두었다. 엄마는 빵빵하던 풍선의 주둥이를 놓친 것처럼 순식간에 작아져 버렸다.

엄마는 이게 주먹으로 깨지나 한번 쳐봤어요, 라는 식의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어쨌든 그 일로 할아버지와 아빠의 충돌은 잠시 소강상태가 되었고 딸들이 엄마의 구급치료와 깨진 유리조각을 치우고 있는 동안 아빠와 할아버지는 어색하게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잠시 동안이었지만 할아버지와 아빠를 주인공이라기보다는 서있는 행인 따위의 보조출연자처럼 보이게 하는 효과는 있었다.

엄마의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아빠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입을 벌렸다.

"나도 이제 나이 오십이 넘었는데 동생들 공부시킨다고 나는 학교도 못 갔어요! 아부지가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다고, 그러면 딴 데 가서 좀 살던지, 왜 저하고만 살아요? 잘난 아들들한테 가서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살아봐요 쫌! 오죽하면 애 엄마가 저러겠어요!"

"내 집 두고 왜 딴 데 가서 사노!"

엄마의 사건은 안중에 두지 않고 할머니가 말을 가로 챘다.

"그래서 니 맘대로 했나? 내가 니 공부 안 시켰다고 어? 애비가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그래서 니 맘대로 집 팔고 땅 팔고 다 판 돈. 엄한 놈들 갔다 줘버렸나? 어? 그 돈이 니 돈이가? 니 동생들은 쥐꼬리만큼 떼 주고 니 혼자 그 돈 다 갔다 버리고 와서는 뭐 잘했다고 큰소리고 큰소리가!"

할아버지는 규칙적으로 손가락질을 하며 언성을 높였다.

"내가 이집에 장남이에요! 장남이 그럼 그 정도도 못해요? 동생 다섯, 제가 다 공부시켰어요! 그럼 됐지 뭘 더 줘요? 줄거나 있어요! 예? 그까짓 거 꼴랑 논이고 밭이고 일 년 내내 농사지어봐야 애들 학원비도 안 나와요 예? 우리 집이 여태 그걸로 산 줄 알아요? 아버지 먹는 거 입는 거 그거다 제가 뼈 빠지게 공장 다니고 일해서 번거예요. 아세요? 예? 그리고 장남이 그 정도도 못해요? 장남이! 예?"

아빠가 억울한 고릴라처럼 주먹으로 가슴을 쳐대며 말했다. 세탁에도 별 관심이 없던 엄마덕분에 마른땅에 발을 구르듯 퍽퍽하고 먼지가 났다.

그렇게 몇 차례 두 부자는 끝말잇기 게임이라도 하듯 집안에 대한 치정(治定)에 관한 본인들의 역할에 대해 주고받았다. 그동안 아빠의 티셔츠는 몇 번 더 혀를 날름거리며 흰 어깨를 보여주었고 할아버지는 오른손으로 뒷목을 여러 번 잡아 재꼈으나 쓰러지지는 않았다. 첫째는 멀찍이 떨어져 그들의 대화를 구시렁거리며 통역하다가 간간히 울음을 터트렸다가 물을 마시고 기침 따위를 해댔다. 둘째와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목도리처럼 등 뒤에 붙어있었고 엄마는 자꾸 풀어지는 붕대를 감아올리며 아빠의 왼팔을 잡아당기거나 등짝을 치며 그만하라고 설득했다. 셋째는 나에게 구조 요청을 보냈다. 꼭 그것 때문은 아니지만 나는 이제 나서야 할 때라고 판단했다.

"이제 두 분 다 그 만 하세요!"

나는 이 상황이 더 지속된다면 그만 이대로 미쳐버리고 말 것 같다는 심약한 소년처럼 소리쳤다. 예상대로 가족들은 일시 멈춤 상태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눈물이라도 흘려볼까, 라고 생각해 보았는데 굳이 그 정도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보통 내가 나서면 상황은 슬그머니 정리가 되었다. 그러나 오늘 두 주인공은 엄마의 혁명시도에 위기의식을 느꼈는지 좀처럼 무대에서 내려올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나는 지친 표정으로 고개를 떨어뜨리고 최대한 힘없이(조금 휘청거렸는지도 모른다) 내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철저히 계산된 걸음이었다. 그 모습을 봤다면 상황은 정리 될 것이라 생각했다. 누구도 내 심기를 건드리는 일은 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제사상에 뜨거운 무국이라도 한 사발 올려줄 사람은 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방으로 들어와 창문을 열었다. 가을밤의 차고 건조한 공기가 얼굴을 매만지고 방으로 들어왔다. 귀뚜라미 하나가 드르륵 하고, 건조하게 울었다. 곧 무리의 귀뚜라미가 따라서 곡을 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정말로 울고 싶었지만 눈물이 나오지는 않았다.

할아버지는 내가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라는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갔다. 부엌방에선 엄마를 볼모로 잡아놓은 아빠가 부산스러웠다. 밖으로 나간 할아버지는 가건물로 만들어 놓은 농기구 창고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수십 년간 농사를 짓던 도구들과 경운기 따위가 파킹되어 있었다. 할아버지는 시간이 날 때 마다 창고를 정리하며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창고 안은 무덤처럼 어둡고 조용했다. 그래도 인정이 많은 둘째가 할아버지를 위로할 요량으로 창고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구급차가 요란하게 소리를 지르며 왔다. 농약이었다. 할아버지는 창고에 들어가 자 마자 제초제를 마셨다. 며칠 후 집에 돌아온 그는 모든 것을 잃은 사람처럼 보였다. 이후 할아버지는 급속하게 쇠락해갔다. 그것은 분명 정상적인 삶의 속도는 아니었다.

등 뒤에서 바람이 많이 불던 해였다. 우리는 모두 정신없이 앞만 보고 걷고 있었다. <끝>

◇당선소감

"첫 독자이자 비평가 아내에 영광 돌려"

"글을 쓸 때는 무언가를 만든다기보다 키워낸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한다"

류노스케를 읽다가 새로 쓰고 있는 소설의 인물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신춘문예에 투고 했던 일은 정말이지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그저 나만의 연례행사쯤으로 올해도 투고를 했다. 에 의미를 두었다. 그걸로 끝이었다.

낯선 번호로 온 전화가 신문사라기에 구독요청을 하는 전화쯤으로 판단하고 어떻게 적당한 핑계를 대고 끊을까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만큼 당선은 나에게 사돈의 팔촌보다 먼 이야기였다.

딱 10년만 쓰자

그 정도 되면 뭐라도 되겠지, 라고 생각했습니다. 스스로 약속한 날이 아직 많이 남았습니다. 그래서 조금 당황스럽고 부끄럽습니다.

당선 소식을 접하고 지금부터 딱 10년 만 더 쓰자, 라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그 정도면 뭐라도 나오겠지, 라고 생각하겠습니다.

매일 두려웠습니다. 소설 나부랭이나 시 쪼가리나 쓰는 짜릿한 일상을 버리고 자본주의에 빠져 앙큼한 어른이 되어 버릴까봐 두려웠습니다.

오늘은 짝사랑하던 짝궁이 마음을 받아준 날처럼 설렙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두려워질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끝내 어른은 되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소설은 엉덩이로 쓴다" 는 황석영 선생님의 말이 떠오릅니다. 아직 엉덩이가 미농지처럼 가볍습니다. 가벼이 엉덩이를 들지 말라는 채찍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욕심내지 않겠습니다.

매일 소설 속으로 출퇴근하겠습니다.

드디어 지하철 경로우대 나이가 되었다며 소녀처럼 기뻐한 홍선자 여사님. 당신이라는 지하철에 무임승차한 아들을 여태껏 태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항상 내 소설의 첫 독자이면서 비평가이자 마지막 독자가 되어줄 아내에게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사랑하고 고맙고 고맙습니다.

졸작에 비해 후한 가능성을 발견해주신 이시백, 한창훈 심사위원과 대전일보사에 감사합니다. 이상한 나라에서 이상한 소설을 쓰는 일로 보답하겠습니다.

◇심사평

능청·유머로 이야기 풀어내 매료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작품은 모두 아홉 편이었다. 다들 나름의 미덕들이 있었으나 진지하면 평이했고 색다르면 억지스러움이 함께 도드라져 설득력이 떨어졌다. 특히 신춘문예용 단편소설이라면 이 정도 구성을 갖춰야 할 거라는 지레짐작이 되레 걸림돌로 작용했다. 무리한 의도는 개성이 될 수 없으니까. 좋은 작품은 물 흐르듯 읽힌다는 점과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은 남도 상상한다는 점을 생각해보았으면 싶다.

우리는 그중 세 편에 눈길을 주었다. 먼저 <출장>. 일정 수준의 서사 능력을 갖춘 데다 소설의 얼개 또한 무난했으나 참신함이 부족해서 상투의 전형으로 흐르고 말았다.

최종심에서 당선작과 끝까지 겨뤘던 작품은 <인공호수에는 오리가 산다>이다. 한 남자가 가위로 미용사를 위협하며 경찰과 대치하는 장면에서 시작하는 이 작품은 대상과의 거리를 적절히 유지하는 것은 물론 과도한 진술과 묘사를 견제한 덕에 상황을 분명하게 드러나게 하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도입 부분만 놓고 본다면 가장 큰 기대를 준 작품이다. 하지만 이 미덕은 이야기를 끌고 가는 큰 축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말았다. 주인공과 서해, 서해의 남편, 인질범이 공통으로 안고 있는 <아픔>이 그저 소설적인 설정으로만 위치하여, 교차 기술하는 기법을 썼음에도, 우리가 겪고 있는 아픔의 근원을 건드는 지점, 또는 역할까지 나가지 못하고 만 것이다. 이 아쉬움 상당히 컸다. 그렇게 써낸다는 게 어려운 문제이긴 하지만 가능성이 보인 것만은 분명하다. 형식적인 배치와 구성을 뛰어넘어 자유롭고 활기 있게 쓴다면 훨씬 더 나은 작품이 나올 듯 싶다.

당선작인 김선욱의 <부자>도 양적으로 과도한 서술이 단점이었다. 말이 너무 많은 느낌이라는 소리다. 거기에다 등장인물들의 갈등이 `관계`에만 머물고 있는 면도 지적되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급격한 변화, 그것으로 인한 불안정이 심화되어 있는 가족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 능청과 유머를 유기적으로 작용시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힘, 그리고 매 순간의 디테일을 충분히 살려냈다는 점을 높이 샀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낸다.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