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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페인트 공 - 성영희

2017-01-01 기사
편집 2017-01-01 16:4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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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사진1
그에게 깨끗한 옷이란 없다

한 가닥 밧줄을 뽑으며 사는 사내

거미처럼 외벽에 붙어

어느 날은 창과 벽을 묻혀오고

또 어떤 날은 흘러내리는 지붕을 묻혀 돌아온다

사다리를 오르거나 밧줄을 타거나

한결같이 허공에 뜬 얼룩진 옷

얼마나 더 흘러내려야 저 절벽 꼭대기에

깃발 하나 꽂을 수 있나



저것은 공중에 찍힌 데칼코마니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작업복이다

저렇게 화려한 옷이

일상복이 되지 못하는 것은

끊임없이 보호색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한 마리 거미가 정글을 탈출할 때

죽음에 쓸 밑줄까지 품고 나오듯

공중을 거쳐 안착한 거미들의 거푸집



하루 열두 번씩 변한다는 카멜레온도

마지막엔 제 색깔을 찾는다는데

하나의 직업과 함께 끝나는 일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가 내려온 벽면에는 푸른 싹이 자라고

너덜거리는 작업복에도

온갖 색의 싹들이 돋아나 있다



◇당선소감

"병상에서도 놓지 않은 시 … 뜻깊은 퇴원축하선물"



아프기 전에는 아프지 않은 것들을 보려했고 아프고 나서는 아픈 것들이 혈육 같아 보였다. 한동안 몸에 병을 들이고 나른한 잠에도 휘청거렸다. 그동안 낭비한 자정과 새벽의시간이 더없이 그리웠다. 이상하게도 시는 그립지 않았으나 주절주절 내가 나에게 털어놓는 잠언이 그리웠다.

기쁨은 기쁨끼리 몰려다니는지 당선이라는 기쁜 소식을 듣게 된 자리는 투병생활을 마치고 퇴원축하를 하는 자리였다. 병중에 있으면서도 시를 놓지 않았던 것을 지켜본 환우들이 분명 좋은 소식이 있을 거라며 퇴원축하와 함께 당선을 미리 축하해 주었었다. 수화기 속의 메시지는 며칠 전 꿈속에서 보았던 하얀 고봉밥그릇에 담긴 듯 만개한 벚꽃으로 만발하고 있었다. 권위의 장을 열어주신 대전일보와 부족한 글을 끝까지 놓지 않고 선해주신 나태주선생님, 이정록선생님께 더없는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누구보다 좋아하실 친정어머니 그리고 저의 빈자리를 묵묵히 지켜준 남편과 사랑하는 딸 다영이와 아들 연욱에게도 이 지면을 빌어 감사와 고마움을 전한다. 특히 전역 후 두 달 동안의 아르바이트로 이 시의 소재가 되어 준 아들에게는 각별한 애정을 더한다. 또한 오랜 시간동안 서로 다독이며 시의 길을 걸어온 문우들과 아픈 중에도 서로 위로와 힘이 되었던 환우들과 이 기쁨을 함께하고 싶다. 어느 순간 아픔이 밀려왔듯이 어느 순간 기쁨이 밀려와 새로운 길 위에 선 지금, 대전일보신춘문예의 전통과 시 정신을 이어받아 따듯하고 인본적인 시인이 되도록 노력하겠다는 다짐으로 벅찬 기쁨을 갈음한다.



◇심사평

"좋은 시는 종이를 박차고 나와 독자를 환대한다"



신춘문예를 준비하는 글쟁이들의 펜 끝에서 새봄의 꽃망울이 터지기 시작할 게다.

2017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은 208명이 953편을 응모했다. 원고를 펼칠 때마다 꽃향기가 일고 꽃씨가 터졌다. 오래된 거름냄새가 풍겼다. 논두렁의 제비꽃부터 도심 복판의 팬지까지 다양한 봄 풍경을 만났다. 어느 꽃은 수증기가 꽉 찬 하우스에서 자신만의 시적 포즈로, 분간할 수 없는 시야를 펼쳐 보이기도 했다. 아쉬운 점도 있었다. 제 꽃잎의 빛깔만을 자랑하느라고 열매와 뿌리의 둥근 사색과 사투를 다 담아내지 못한 경우는 북을 돋워주고 싶었다. 꽃대나 이파리만으로도 땅 속 구근과 꽃씨의 과거와 꼬투리의 미래까지 볼 수 있는 여백이 큰 작품을 기다렸다. 전년보다 전반적으로 작품 수준이 향상이 되었고 신선한 작품이 눈에 많이 띄었다.

최종심에 든 작품은 성영희 님의 「페인트 공」 외 3편, 박성수 님의 「오렌지 홈런」 외 4편, 양순승 님의 「어머니의 문장을 쓰다」 외 2편이었다. 참신한 문장과 감정의 절제력과 현실을 읽어내는 시인의 진정성 등을 두루 갖춘 작품에 심사자의 마음이 모아졌다. 서울의 양순승 님은 진정성과 다정함이 장점이었지만 다년생 화초 같은 오래된 소재와 표현의 익숙함이 마음에 걸렸다. 광주의 박성수 님은 그 표현의 참신함이 감동으로까지 잇대어지지 못하고 부평초처럼 떠돌았다. 곧 뿌리모자가 묵직해져서 시적 기둥을 잘 받치리라는 기대를 주었다.

당선의 영광은 자연스레 인천의 성영희 시인에게로 모아졌다. 좋은 시는 스스로 종이를 박차고 나와 독자를 환대한다. 살아서 꿈틀거린다. 시의 명랑성이 잔치마당을 만들고 언어유희는 가락을 이루며, 그 노랫말이 현실이라는 구들장에서 온기를 끌어올리며 굴뚝연기처럼 하늘로 퍼진다.

신명 좋은 시인의 탄생을 축하한다.

심사자들의 눈이 어두워서 선외로 밀려난 분들에게도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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