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엄청난 스트레스 속에 살았던 영조(英祖)는 치세 52년 반세기에 걸쳐 금주령을 내린다. 술 마신 혐의로 숭례문 앞에서 종2품 고위관리의 목을 손수 베기도 했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술을 만들고 술을 마셨다. 점차 힘없는 아랫것들만 걸려들었으며 이를 빌미로 관리들의 부패만 늘어갔다. 뒤를 이은 정조(正祖)는 즉위 즉시 금주령을 풀었다. `사람에게 유익한 것은 담배만한 게 없다`던 담배 예찬론자로 유명하지만 술에도 유별난 임금이었다. 정조의 술자리 원칙이자 건배사는 `불취무귀(不醉無歸).` 취하지 않으면 집에 갈 생각 마라! 마셨다 하면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에다 술자리 버릇은 어거지로 술 권하기. 동석한 사람들의 괴로움은 가히 상상이 간다. 물론 마시기 전 잔을 든 채 의미 있는 말씀도 계셨다. `옛 사람들은 상대를 취하게 한 뒤 그 사람의 덕을 살펴본다 하였다. 모름지기 각자 자기 양껏 마시도록 하라.` 그리고 또 무지막지 퍼 먹이기. 술자리의 역사도 오래오래 되풀이되고 있다.

다산 정약용도 정조에게 호되게 당한 사람이다. `독한 소주를 옥으로 만든 필통에 가득 따라 하사하시기에 사양하지 못하고 다 마시면서 혼자말로 나 오늘 죽었구나(吾今日死矣) 했다.` 참고로 당시의 필통 한가득은 한 바가지 가량의 부피. `임금을 모시고 공부하던 중 술을 큰 사발로 하나씩 하사받아 마셨는데 여러 학사들이 술이 취해 정신을 잃고 자리에 뒹굴고...` 다산이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나오는 이야기다. 그러면서 아비답게 교훈을 내린다. `참으로 술맛이란 입술을 적시는데 있다. 소가 물마시듯 술이 곧바로 목구멍으로 넘어가면 그 무슨 맛이 있겠느냐.`

그 무렵 술자리 풍경은 어땠을까. 박지원의 얘길 들어보자. `큰 사발에 술을 철철 따라 이맛살을 찌푸리며 들이킨다. 이는 술을 쏟아 붓는 것이지 마시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마셨다 하면 취하고 취했다 하면 술주정이고 뒤이어 싸움질에다 마지막엔 술항아리며 술잔을 죄다 걷어차 깨어버린다.` 술자리 끝엔 대개 열혈남아가 출현하는 법. 그 당시에도 마찬가지였고 술로 인한 온갖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술자리 실수로는 세조 때 영의정 정인지를 따라갈 사람이 없다. 평소 취중 실수가 잦던 그는 급기야 술자리에서 세조를 `너`라 부르고 말았다. 세조 4년 9월 경회루. `너는 무슨 말을 하는가? 옛날부터 그렇게 가르쳐 주어도 유학의 도리를 모르는가?` 왕조시대 그것도 세조 앞. 엄청난 불경이자 대역죄였다. 하얗게 질린 주위에서 일제히 극형을 청했지만 `술로 인한 실수로 공신을 벌할 수는 없다`며 세조는 끝내 쿠테타 동지를 지킨다. 명신 정인지는 길이길이 83세의 천수를 누렸다. 재산 불리기에도 탁월했던 장안제일의 갑부로, 배신의 보답인 김종서의 며느리와 박팽년의 처를 종으로 부리면서 말이다. 우리의 머리에 박힌 역사는 들여다 볼수록 어지러이 춤을 추고 술자리에서도 또 다시 역사는 흐느적거린다.

술자리는 그 어떤 찬사나 폄훼로 치장된들, 따분한 현실을 벗어나고픈 인간의 욕구가 있는 한 결코 사라지지 않을 터. 듣기에 좀 거북스럽던 `병신년` 한 해도 이제 곧 역사가 된다. 올 연말 술자리 즐거우시길. 단 입술은 꼭 술로 적셔 주시고 그리고 가능하시다면 불취필귀(不醉必歸)!

대전보건대 방송문화콘텐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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