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8년, 병자호란이 막을 내리고 그 이듬해 봄, 당대의 문장가이자 우의정 장유(張維·1587-1638)로부터 인조에게 진정서가 올라온다. `외아들 장선징의 처가 청나라에 잡혀갔다가 속환(贖還 몸값을 주고 돌아옴)되어 지금 친정에 있다. 함께 조상의 제사를 받들 수 없으니 이혼하게 해 달라.` 심양으로 끌려간 사람들이 돌아오게 되면서 조선은 전쟁의 후폭풍에 시달리게 되니 그 중 가장 비극이 바로 여성의 `절개`라는 문제였다. 양반 평민 가릴 것 없이 돌아온 부인이나 규수를 내치거나 강제로 자결하게 하는 등 상황은 심각했다. 자살자도 속출했다. 같은 시기, 승지를 지낸 한이겸이 호소문을 올린다. `딸을 속환시켜 왔는데 사위가 딸을 버리고 새 장가를 들려고 하니 원통하다.` 딸 가진 부모는 그야말로 죄인이었다. 이런 판국에 장유가 최초로 그 아픈 곳을 건드린 것이었다.

조정에선 논의가 시작되었다. 장유의 평생지기이자 좌의정이었던 최명길은 강력히 이혼을 반대한다. 평소 `조정과 대신이 방책을 마련하지 못한 탓에 여자들이 욕을 당한 것이지 그녀들의 자의가 아니다`라던 그는 이때도 `만약 내쳐도 된다는 명을 내린다면 돌아오기를 원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니 이는 부녀자들을 이역의 귀신이 되게 할 뿐이다`라며 반대의사를 굽히지 않았다. 인조는 이 의견을 따라 이혼을 불허한다. 그러나 최명길은 극소수파에 지나지 않았다. 이 무렵 그에 대한 사관(史官)의 평을 보자. `사로잡힌 부녀들은 비록 본심이 아니었다 할지라도 변을 만나 죽지 않았다. 어찌 절의를 잃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절개를 잃었으면 남편의 집과는 이미 의리가 끊어진 것. 억지로 합하게 해서 사대부의 가풍을 더럽힐 수는 없는 것이다. 아! 풍속을 무너뜨리고 이 나라를 오랑캐로 만든 자는 최명길이다. 통분함을 금할 수 없다.` 두고두고 최명길은 욕을 먹는다.

그 해 장유는 52세의 나이로 죽는다. 우울하기만 한 말년이었다. 호란 당시 강화도로 피난 간 어머니는 강화유수였던 친동생 장신(張紳)의 역사에 길이 남는 추태로 인해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숨을 거두었다. 제 어미와 백성들을 내던진 채 육지로 도주하기 바빴던 동생은 결국 왕명에 의해 자결하고. 거기에다 심양에서 돌아온 반갑잖은 며느리. 그나마 딸은 후일 효종으로 등극하는 봉림대군의 부인이었으니 사위부부가 심양에 오랫동안 잡혀있다 한들 `절개`문제로 휘둘릴 일은 없었을 터였다. 그로부터 2년 후. 장유의 처 안동김씨가 또 다시 진정서를 올린다. `며느리가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으니 아들의 이혼을 허락해 달라.` 사돈 내외의 끈질긴 호소에 인조는 고육책을 내놓는다. `장선징이 훈신(勳臣)의 외아들임을 감안하여 특별히 그에게만 이혼을 윤허한다.` 며느리는 내쫓겼고 손자들은 그 어미를 잃었다. 그뿐인가? 눈치만 보던 대부분의 사대부 집안들은 돌아온 며느리를 내치고 새 며느리를 맞아들였다.

경기도 시흥시 조암동 서해안고속도로 지척, 장유부부 합장묘. 웅장한 거북이 등을 탄 신도비는 조선 제일의 규모를 자랑하고 장유를 향한 송시열의 찬사가 끝없이 늘어진다. 묘 앞 비석엔 우의정 벼슬이 또렷하다. 참으로 울적했다. 역사산책은 왜 이리 자주도 가슴시린 산책일까.

대전보건대 방송문화콘텐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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