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국가시스템 구축" 메아리 대권 놀음·계파 싸움에 뒷짐 국민의 탄핵심판 두렵지 않나

서울 덕수궁 옆 관저에서 생활하는 찰스 헤이 주한영국대사에게 촛불시위는 꽤나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한국의 촛불집회는 그 규모와 전개 상황, 결과에 이르기까지 모두 나에겐 놀라운 경험이었다. 영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의 찬사가 멋쩍어 "영국의 명예혁명에 비유되기도 한다"고 하자 "명예혁명은 촛불시위와 비교하면 매우 폭력적이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흔히 무혈혁명으로 불리는 명예혁명은 1688년 영국 의회와 네덜란드의 오렌지공 빌럼이 연합해 제임스 2세를 퇴위시키고 잉글랜드의 윌리엄 3세를 옹립한 사건이다. 이름과 달리 잉글랜드에서 피를 흘리지 않았지만 아일랜드에세는 세 차례의 대규모 무력 충돌이 빚어졌다. 다만, 3년 전인 1685년에 일어난 몬머스 반란에 비해 희생자가 적었다는 이유로 무혈혁명의 반열에 올랐다. 사실은 명칭보다 오늘날 영국 의회주의를 잉태시켜 세계사적 의의가 큰 대사건이다.

헤이 대사의 언급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정국에서 우리가 얼마나 위대한 시민의식을 보여줬는지 새삼 돌아보게 한다. 촛불 대신 태극기를 든 보수의 시위라고 다르지 않다. 물론 그는 `촛불집회가 한국의 정치지형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는 전적으로 한국인들이 결정할 문제`라는 전제를 빼놓지 않았다. 헤이 대사의 촛불 시위와 관련한 발언의 방점은 이 부분에 찍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진행형이려니와 오늘의 대한민국에 시사하는 대목이 하나 둘이 아니라는 점에서다.

이런 측면에서 블룸버그 통신의 분석은 귀담아 들을 만하다. 탄핵안이 가결된 배경엔 한국 정치와 함께 재벌 개혁을 압박한 분노의 물결이 있었다는 것이다. 나아가 브렉시트(영국의 EU(유럽연합) 탈퇴)나 트럼프의 깜짝 당선 등 지구촌의 포퓰리즘이 기득권에 대한 대중의 불만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는 만큼 한국 촛불 시위대에서도 포퓰리즘을 볼 수 있다고 진단했다. 구체제 청산과 새로운 대한민국 건설이라는 메아리로 돌아온 광장의 외침을 정치권이 더 이상 외면해선 안 되는 증거이자 이유이다.

불행히도 여의도 정치가 내놓는 해법은 국민 눈높이와 간극이 너무 크다. 새 국가 시스템을 마련하라는 요구에 국회는 개헌특위 설치를 합의했지만 논의는 지지부진하다. 야권 일각에서 `대선 전 개헌 불가능`을 못박는 걸 보면 여론에 등 떠밀려 구성했다는 의구심을 감출 수 없다. 정치권이 협치로 국정마비 사태를 해소하겠다며 만든 여야정협의체는 여당과 야당, 정부가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면서 헛돌고 있다. 유력 대권주자들의 셈법이 크게 엇갈리는 데다 당리당략과 계파 다툼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대권 가도에 탄력을 받은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와 국민의당 안철수 전 대표는 "지금은 때가 아니다"며 개헌 공론화에 부정적이다. 논의 불씨를 지피려는 다른 후보들의 움직임도 세몰이의 방편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또 대통령 탄핵의 직접 책임이 있는 새누리당의 계파 싸움은 목불인견 수준을 넘어섰다. 주류와 비주류 간 시정잡배들도 입에 담지 않는 저주의 막말을 쏟아내면서 전면전에 들어가 협치의 최대 걸림돌이 됐다. 집권여당으로서 책임감 발휘는 고사하고 제 앞가림 하나 못하는 꼴이다.

박 대통령 탄핵안이 처리된 날 공교롭게도 우리나라 인구가 앞으로 50년 동안 800만 명이 줄어들 것이란 뉴스가 나왔다. 통계청은 또 청년들의 노인부양 부담이 크게 늘어, 지난해 5명당 1명이던 것이 20년 뒤에는 2명당 1명이 된다고 내다봤다. 국민연금의 경우 2058년이면 고갈될 것이라는 전망이 곁들여졌다. 시한부인생인 셈인데 골든 타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더 큰 문제다. 어디 인구 쇼크뿐일까. 고질병인 국론 분열에서부터 저성장, 급변하는 안보환경 등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은 쓰나미 앞에 놓인 처지다. 세계인이 부러워한 촛불·태극기 시위가 명예혁명 때와 같은 결실을 맺기는커녕 분노를 더 키우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여야는 정치가 응답하지 않으면 그 다음 탄핵 화살이 여의도로 향할 것임을 잊지 말라. 서울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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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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