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노래 어우러진 축제로 변모한 촛불집회 인간은 놀이로 질서 배우고 억압된 감정 표현 분열된 현실 저항하며 모순 바로잡는 과정

송희영 서울예대 교수
송희영 서울예대 교수
아침이면 해가 뜨고 저녁이면 어둠이 내렸다. 길가의 꽃들은 철따라 피었다 지고, 단풍든 가로수들은 거리에 알록달록 푹신한 카펫을 깔아 주었다. 하루하루 해결해야 할 근심은 있었지만 세상은 그렇게 자연의 섭리를 따라 평화로이 흘러가는 듯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공인받지 않은 특정 인물 몇몇이 권력의 장막 속에 숨어 사익을 챙기고 금권을 가로챘다. 눈앞에 펼쳐진 위장된 연극무대와 별반 다름없는 현실에 실망한 국민들이 매주 주말 저녁 서울 광화문광장으로 모여든지 벌써 6주 째. 상처 입은 국민주권을 밝힐 촛불은 거대한 빛의 파도가 되어 그 사이 내린 첫 눈도 녹여버렸다.

촛불에서 횃불로 갈아탄 간절한 외침은 곧 닥칠 한파도 물리칠 기세다. 그런데 참 이상하고 신기한 일이다. 광장에 사물놀이가 등장하고, 록 밴드의 연주가 이어진다. 심지어 사례금은 필요없으니 저 무대에 설 기회를 달라는 저명가수들이 줄을 서 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백만에 가까운 군중들이 모여 외치는 절망과 분노의 함성이 하나도 거칠지 않다. 한 손엔 촛불을, 다른 한 손엔 가족과 이웃의 손을 잡고 행진하는 걸음걸이에 생기가 넘친다. 눈길이 마주친 사람들끼리 슬며시 웃음마저 오간다. 1987년 6·10 항쟁 이래 최대의 집회였다는 격정적인 장면을 보도하는 TV 뉴스 끝머리에는 "평화로운 축제로 마무리했다"는 자막이 실린다. 외신들 또한 폭력적인 충돌로 번질 것이란 우려와 달리 질서와 절제, 그리고 열기와 흥이 혼재된 "축제 같은 시위현장"이라며 경이롭게 보도하고 있다. 무언가 잘 못된 일이 아닐까? 국민들이 진정 원하는 것이 부패된 사회정의의 회복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가무악이 어우러진 축제의 장으로 변모한 시위현장은 무엇으로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지금으로부터 약 80여 년 전, 네덜란드의 역사학자 요한 하위징아(1872-1945)는 인간을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즉 `놀이하는 인간`으로 명명하였다. 인간이 누리는 모든 문화현상의 근원은 인간의 태생적 속성 중 하나인 `유희적 본능`에서 유래하였다는 것이다. 하위징아는 놀이의 특성을 네 가지로 이야기한다. 첫째, 놀이는 명령에 의하거나 의무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이며 자유로운 행동이다. 둘째, 놀이는 인간에게 정신적인 풍요와 여유를 제공한다. 그것은 일상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셋째, 놀이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다. 시공간적 제약에 의해 놀이는 기억에 의해 전승되는 집단의 전통이 되기도 하며 놀이가 열린 장소는 신성성을 갖는다. 넷째, 놀이에는 자유롭되 엄격한 규칙과 절대적인 질서가 지배한다. 결과적으로 인간은 놀이를 통해 규칙과 법칙, 질서를 터득한다. 축제는 인간의 놀이 본성이 문화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또한 억압되고 간과되었던 인간의 감정 표현이 합법적으로 허용된 기회이기도 하다. 축제는 현실을 부정하고 파괴하는 속성을 갖는다. 그러나 그것은 분열된 현실에 저항하여 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과정이다. 모순되고 상반된 가치가 충돌하며 무질서가 난무하는 일상적인 시간과 공간의 사유에서 벗어나 신과의 동일체를 이루는 이상적인 세계에 다다르고 싶은 인간 본능의 표현이다.

이번 주말, 중차대한 대통령 탄핵 국회표결이 예정돼 있다. 그러나 어쩌면 그 결과에 관계없이 이번 주말에도 광장집회는 계속될지 모른다. 한파의 날씨에, 왜 자꾸 우리는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모여드는가? 그것은 절박한 구호와 간절한 염원을 노래와 춤, 그리고 연주라는 변주(變奏)를 동원해서라도 잃어버린 "국민적 축제"를 찾고 싶은 갈망의 표현이 아닐까? "문명은 일정한 규칙에 의거하여 `놀이`되는 것이며, 진정한 문명은 `페어플레이(fair-play)`를 요구한다"(하위징아·이종인 역)는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의 가르침을 책이 아닌 현실에서 실천하려는 국민적 열망이 아닐까?

최근 최순실사태로 야기된 우리사회의 집단적 혼란과 분노는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사회에 "인간 삶에 있어서 축제는 무엇인가?", "이 시대 우리 한국인들은 왜 축제를 갈망하는가?"라는 담론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운외창천(雲外蒼天)이라, 어두운 구름 밖으로 나오면 맑고 푸른 하늘이 나타난다고 했던가? 피할 길 없는 난국을 `성숙한 놀이문화`로 만들어가는 우리 한국사회에서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어 참으로 다행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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