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 사태로 드러난 대통령의 배신 최고지도자에 대한 맹목적 의리 무의미 위정자라면 국민과의 의리부터 챙겨야

한 때 조직폭력배를 소재로 한 한 영화가 흥행했던 적이 있다. 영화 `친구`나 `두사부일체`시리즈가 대표적인데, 이들 영화의 공통점은 유독 의리(義理)를 강조했다는 것이다. 뒷골목의 음습한 이야기지만, 그들이 내세우는 의리가 묘하게 감성을 자극하면서 때로는 그들의 불법행위까지 눈감아줄 수 있는 아량을 강요당했던 기억이다.

정가에서도 의리가 부쩍 회자되는 요즘이다.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이후 사퇴압박을 받고 있는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가 자진사퇴를 거부하는 이유로 의리를 거론하면서부터다. 그는 지난 7일 최고위원회의에서 "고립무원의 대통령이 이 난국의 무게에 짓눌려 힘들고 괴로워 신음하시는데 나 혼자 마음 편하자고 유유히 곁을 떠나는 의리 없는 사람이 되기 싫다"고 표명했는데, 이후 친박(친박근혜)계를 중심으로 박근혜 대통령을 지켜내야 한다는 명분으로 공공연히 사용된다.

야권에서도 이를 언급하는 사례가 심심치 않다. 무수히 많은 잠룡들이 대선을 향한 행보를 본격화하면서 각 캠프별로 국회의원은 물론 명망가, 선거전략가에 대한 러브콜이 한창인데, 정치적 인연 및 사적인 친분 등을 앞세워 의리를 지켜달라는 식이다.

압권은 국가 전체를 블랙홀에 빠뜨린 박 대통령과 최순실의 의리다. 박 대통령은 자신이 가장 어려웠을 때 도와준 사람이어서 최태민을 의지했고 그의 딸 최순실을 가까이 했다고 말했다. 자신을 도와준 최태민·최순실에게 의리를 지켰다는 것과 다름 아니다. 실제로 이성한 전 미르재단 사무총장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최순실씨가 박 대통령을 언니라고 부르며 `내가 지금까지 언니 옆에서 의리를 지키고 있으니까, 내가 이만큼 받고 있쟎아`라는 발언을 했다"고 전했다.

의리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또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바른 도리`다. 정치권에서 회자되는 것과는 전혀 의미가 다르다. 불법적으로 누구에게 은혜를 갚고, 사사롭게 인연을 지킨다는 게 어찌 의리로 포장될 수 있는 지 모르겠다.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와는 전혀 무관하며, `사람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도리`라 할지라도 `바른`이 빠지지 않았는가. 조직폭력배들이 조직과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조직에 반하는 이를 잔인하게 징벌하기 위한 `의리`론과 다름아니다.

통 크게 양보해서 `은혜를 갚는 것`도 의리라 치자. 위정자라면 대통령보다 그를 믿고 선택해준 국민, 당원동지들부터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최순실 게이트`라는 희대의 국정농단 행위는 그야말로 한편의 막장드라마 그 이상이다. 1987년 민주화 항쟁으로 얻은 민주주의 가치가 내팽개쳐지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자부심마저 사라져버린 2016년 가을이다. 국민들은 `이게 나라인가`라며 충격에 빠졌다. 국가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마저 무너지면서 원칙과 정의를 바로 세우려는 염원이 담긴 촛불이 전국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박 대통령은 지난 4일 대국민 담화에서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 자괴감이 들 정도로 괴롭기만 하다"고 언급했는데, 이를 지켜보는 국민들은 더 괴롭다.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을 뽑았나"라는 배신감이 극에 달했다.

국민을 배신하고, 국정운영 동력을 잃은 최고지도자를 가여이 여기기에 앞서 국민과의 의리를 중요시해야 하는 게 여당 몫이라면, 야권은 어떻게 국민과의 의리를 지킬 것인 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때다.

작금의 현실이 얼마나 위중한 지는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청와대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라면, 이제 국회에서 중심을 잡아야 한다. 특히 정부와 여당에 깊은 배신감을 느끼고 있는 국민들로선 여소야대 정국에서 야권의 `의리`에 더욱 기대를 걸 수 밖에 없다. 대선이나 당리당략을 고려한 정치적 행보라는 일각의 평가를 부정하고 싶은 이유다. 시위 현장에 교복 입은 학생, 유모차를 끈 엄마, 그리고 배신감에 휩싸인 실버세대까지 나온다는 것은 더 이상 시간이 없다는 얘기다. 국민과 함께 분노하면서도 당당히 해법을 내놓고, 그에 따른 로드 맵을 제시하는 야당을 보고 싶다. 송충원 서울지사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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