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임 후에도 최순실 도움 받았다면 국정 무단침범한 것과 다름 없어 국가시스템 망친 책임 모면 안 돼

나병배 논설위원
나병배 논설위원
그제 대통령은 녹화방송을 빌려 짤막한 사과문을 읽었다. 이른바 비선실세라 불리는 최순실씨에게 대통령 연설문, 홍보물 자료의 표현 문제와 관련해 일정기간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는 게 요지였다. 핵심 어휘는 대통령 연설문·최순실이다. 대통령 연설문을 미리 들여다 볼 정도로 최씨가 센 여자였다고 여기면 순진한 해석이다. 반대 시각으로 접근해야 맞다. `최순실 국정개입 의혹`은 본질적 문제와 결부되기 때문이다.

최씨는 공적인 직무와 권한을 부여받지 않았다. 대통령과의 40년 인연도 두 사람의 개인사일 뿐이다. 정상을 감안해 특정하자면 특수관계인에 해당한다. 그런 관계와 대통령의 공적 통치 영역에 개입하는 행위와는 질적으로 구별된다. 그럼에도, 대통령은 연설문에 도움을 받았다고 토로했다. 취임 이후에도 한동안 그랬음을 인정한 것인데, 이는 `국정 무단침범`으로 규정할 만한 합리적인 사유에 해당한다.

대통령 연설문은 그 직무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추상적으로 표현하면 대통령 실존의 문제이기도 하다. 대통령이 국민과 소통하고 교감하는 유용한 수단내지 도구로서의 연설문엔 그의 철학, 역사인식이 투영되면서 국정운영의 방향성이 제시된다. 계기는 크게 상관없다고 볼 수 있다. 국가단위 행사장 경축사·기념사에 담아도 되고, 국무회의 때 이른바 `말씀자료` 형태로 국정 현안에 대한 기본적인 입장과 논거를 강조하는 것도 방법이다. 일례로 며칠 전 대통령이 국회 시정연설을 통해 개헌 화두를 던진 것도 시기, 장소, 정치권 변수를 계산에 넣은 것일 수 있다.

대통령 연설문은 그래서 포괄적 통치 행위의 연속선 상에 놓인다. 핵심 국정현안 및 중심 개혁 과제는 물론, 외교·안보·국방 정책과 관련 될 경우라면 두말할 나위가 없다. 대통령 연설문이 육성으로 실행될 때까지 원문 텍스트에 대해 보안·기밀 규정에 묶어 두는 것도 사안의 파급력과 전격성 효과를 극대화해 정책 목표를 담보하기 위함이다. 김영삼 정부 시절 금융실명제 전격 시행이 좋은 예다. 이게 새 나갔거나 낌새가 노출됐다면 대혼란은 둘째 치고 정책으로서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최씨는 그런 대통령 연설문에 간섭하고 수정했음을 증명하는 `스모킹 건`이 됐다. 대통령의 국정 판단에 최씨가 새치기해 침입한 것이며, 이는 국가시스템상 용납될 수 없는 행위다. 실정법 위반 논란을 떠나 연설문 관련 공무를 배분받지 않은 최씨가 대통령 연설문을 사전에 열람하고 문구를 수정하는 등 첨삭한 행위에 대해선 어떤 발명도 용인 되지 않는다. 대통령 연설문은 대통령의 생각 철학, 국정 현안에 대한 운용 방향을 때와 장소의 필요성에 따라 생성되는 절차를 밟는다. 그런 이유로 연설문의 최고·최종 수정 권한자는 대통령이다. 최씨의 행적 파일은 이 경로에서 대통령이 무력화된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증폭시킨다. 이 나라를 최씨가 원격운영해온 정황이 드러나고 있는 마당에 국민이 집단 공황상태에 빠지는 것은 당연하다.

대통령 비서실엔 연설기록비서관 직제가 운용된다. 이 곳 인력이 대통령 연설문 초안 작성을 전담한다. 실무 비서관급은 글쓰기 노하우에 관한한 내로라 하는 인사중에서 뽑는다. 연설문 전담 직제를 비서실장 아래 두고 운영하는 것은 대통령 메시지를 정확하고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사무의 엄중함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연설기록비서관의 사무 특성상 대통령과의 호흡이 중요하다. 대통령의 심중을 꿰뚫어보는 역량이 요구되며, 때로는 하나를 말해주면 열을 헤아릴 줄도 알아야 하는 자리다.

노무현 정부에서 연설비서관을 지낸 강원국씨가 펴낸 `대통령의 글쓰기`라는 책을 보면 대통령 연설문 사무의 치열함이 감정이입된다. 말과 글에 관한한 노 대통령은 발군이었음을 증언하는 한편, 그 밑에서 연설문 작성을 보좌한 나날에 대한 기록이자 글쓰기의 정석 같은 책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최씨가 대통령 연설문에 `칼질` 권한을 행사했다는 사실을 대비시키면 허탈감이 엄습한다. 최씨는 대통령 연설문 생태계를 망가트린 희귀한 포식자가 아니었나 싶다.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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