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만 탈북촌' 함의 주목 北 급변사태 배제 못해 준비없을땐 재앙 부메랑

낡은 취재수첩을 들춰보니 2013년 2월 19일이었다. 이명박(MB) 당시 대통령은 임기를 정리하며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MB는 청와대 영빈관에서 한 기자단과의 고별 오찬에서 의미심장한 발언을 남긴다. 퇴임 후 계획을 묻는 질문에 "통일이 되면 국립대전현충원을 찾아 천안함 46용사의 이름을 하나, 하나 부르겠다"고 밝혔다. 엿새 뒤면 `전직`(前職)이 될 우리 나이 일흔 세 살의 이 대통령에게 통일은 과신이었을까, 기대였을까.

사실 단서가 없지 않았다. MB는 앞서 가진 춘추관 고별 대국민연설에서 "가슴 깊이 안고 가야 할 아픔이 있습니다. 바로 천안함 46용사입니다. 이들을 떠나 보내며 한사람, 한사람 모두의 이름을 부를 때 목이 메고 가슴이 저렸습니다"라고 말했다. 방점은 다음에 찍혔다. "언젠가 통일이 되는 바로 그날, 저는 이들의 이름을 다시 한번 한사람, 한사람 부르고자 합니다." 지금 생각하니 MB는 통일을 생전(生前)의 일로 인식한 게 분명했다. 한국인 기대 수명이 여든 세살인 데 살아서 통일을 보겠다고?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싶었던 일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통일을 염두에 둔 듯한 언급과 행보가 그 것이다. 박 대통령은 최근 북한 주민에게 탈북을 적극 권유하더니 `체제 붕괴`, `자멸`, `김정은 광기` 같은 발언을 쏟아 냈다. 수위나 내용으로 볼 때 최고급 정보와 정교한 분석없인 내놓기 어려운 내용이다. 심리전 차원을 넘어 `레짐 체인지`(정권 교체)를 겨냥했다는 해석에 보다 무게가 실리는 이유다.

신호는 명확하다. 체제에 질린 탈북자 행렬이 물결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다. 격노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외교 핵심 인물을 줄줄이 숙청하는 와중에도 평양 엑소더스(탈출)는 끊이지 않는다. 북한 정보와 가까운 거리에 있는 국회 운영위의 한 의원은 "북한 동향이 심상치 않다. 로얄티(충성)가 특별한 엘리트 탈북자가 많은 걸로 파악된다`고 말했다. 정부의 `10만 탈북촌` 건설 시사나 박 대통령의 `실제 상황` 거론이 예사롭지 않다. 급작스런 통일 상황을 상정하지 않고선 이해하기 힘들다.

이런 가운데 한·미 당국이 `작전계획 5029`를 점검하고, 세부 계획을 가다듬고 있는 건 무리가 아니다. `작전계획 5029`는 북한의 급변사태를 핵과 미사일, 생화학무기 등 대량살상무기(WMD)의 제3국 유출을 비롯 정권교체, 쿠데타 등에 의한 내전 상황, 북한 내 한국인 인질사태, 대규모 주민 탈북사태, 대규모 자연재해 등 6가지 유형으로 분류한다. 이 중 정권교체와 탈북사태가 북한을 뒤흔들면서 통일을 앞당길 촉매제로 작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음 직하다. 또 북핵 위협에 빨간불이 켜진 미국의 예방·선제타격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노릇이다. 도둑 고양이처럼 통일과 맞닥뜨릴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우리 겨레로선 통일이 당위란 건 아무도 부인 못할 것이다. 하지만 축복이 될 지, 재앙이 될 지 가늠하기 쉽지 않다. 1990년 베를린 장벽이 갑자기 무너진 독일의 경우 직접적 통일비용은 당초 1조 마르크로 예상했지만 2조 마르크를 넘어섰다. 대략 우리 돈 1000조 원이다. 그 뒤 20년 동안 3000조 원을 들어 부었다. 당장 통일 비용을 남한의 경제력만으로 감당 가능한 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분단비용 보다 헐값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여기에다 70년 넘게 다르게 살아온 이질감은 어떻게 할 건가.

백범 김구는 광복을 맞으며 "올 게 너무 일찍 왔다"고 했다. 미국과 옛 소련의 힘으로 해방된 걸 통탄한 예지였다. 사회 갈등과 이념 투쟁, 그 뒤로 이어진 남북 분단은 예고된 수순이었다. 통일은 상상만으로 가슴 벅찬 감동이지만 한편으론 두려움을 감추기 어려운 일이다. 외교·안보 환경은 급변하건만 지나치다 싶게 무감각한 게 바람직한지 의구심이 든다.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 기회는 독이라고 했다. `마흔 살 신동(神童)`에서 통일 뒤 유럽 1등 국가가 된 독일의 길을 따라 걸을 수 있을까, 자문하게 되는 요즈음이다. 서울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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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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