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오디세이] "문화상품 세계화, 가장 한국적인 전통에 미래가 있다"

채향순 교수의 장고춤.   사진=채향순 교수 제공
채향순 교수의 장고춤. 사진=채향순 교수 제공
약속 시간을 정확히 지킨 게 되레 결례가 되고 말았다. 오후 1시 30분 연구실에 들어서자 채 치우지 못한 도시락 냄새가 먼저 반겼다.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산하 한국전통예술위원회 채향순 위원장(중앙대 예술대 무용전공 교수)은 제자들과 늦은 점심을 서둘러 마치는 중이었다. 일상이라고 한다. 화려하고 신명나는 가무악(歌舞樂)의 새 경지를 펼쳐온 그의 또 다른 민낯을 보았다. 채 위원장은 이렇게 학생들과 부대끼며 밤 12시가 넘어 귀가하곤 한다고 했다. 6-7일 열리는 제 2회 세종대왕전통예술경연대회를 준비 중인 채 위원장에게 행사 내용과 무용가로서의 삶, 계획 등을 들어봤다. 채 위원장은 "세종대왕은 한글 창제뿐 아니라 우리 전통예술의 발전과 혁신을 주도해 치음치세(治音治世)를 열었다"고 밝혔다. 이어 "세종이 숭모한 예술은 바람처럼 자유로운 동시에 가을 서리처럼 엄격했다. 예술을 지켜보는 대중의 눈과 귀가 정확하다는 것을 간파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국내 최고의 예술명인들이 절차탁마의 기량을 발휘하고, 숨겨진 인재들이 드높이 솟아오르는 등용문이 되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대담=송신용 서울지사장

-행사를 소개해 달라.

"전통예술의 올바른 전승과 체계적 계승 발전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자는 취지다. 또 한류문화의 원초적 본질을 확고히 함으로서 전통의 위상을 널리 알리자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한글과 국악 창제의 세종정신을 바탕으로 예술인들의 노력과 총체적 혼을 담아 승화시키고 싶었다. 명인부와 일반부, 무용학생부로 나눠 무용, 판소리, 민요, 기악 등 4개 부분에 걸쳐 예선과 본선, 결선, 종합결선의 순으로 경연을 치른다."

-민간 차원에서 기획하고 추진하기가 쉽지 않을 듯 한 데 행사를 구상한 계기가 있다면.

"전국적으로 무분별한 경연대회가 너무 많다. 전통의 올바른 전승과 계승을 위해서는 진정한 의미의 경연대회가 필요하다. 이른바 등용문, 그 의미는 참된 예술가의 진취적 기상을 보듬어주는 데 있다고 믿는다. 주관이야 우리가 하지만 서울 동대문구청과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공동 주최하고, 국회와 교육부 등 여러 기관 단체에서 후원한다."

-가무악 외길을 걸었다. 처음 무용을 시작한 동기가 무언가.

"54년이 됐나 보다. 여섯 살 때부터 춤을 췄다. 이모께서 무용을 하셨는 데 (내가 어렸을 때) 음악만 나오면 일어나 춤을 췄다고 한다. 너무 춤이 좋았고, 그러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가장 한국적인 무대를 펼쳐 보인다는 평가다. 채 위원장에게 무용이란 어떤 건가.

"과찬이다. 내게 춤이란 추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잠시라도 쉬면 몸도 아프고, 무언가 텅 빈 것처럼 느껴진다. 춤은 나의 생활이자 행복이다. 내게 모든 그리움은 발 끝을 거쳐 무대에 닿아 있다. 그렇게 무대를 통해 세상을 바라봤고, 무대를 통해 세상을 이야기했다. 춤 인생 5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세상을 향한 그리움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 죽는 날까지 춤을 추지 않을까."

-해외공연을 숱하게 했고, 가무악으로 세계에 이름을 날렸다. 기억나는 일이 많을 것 같다.

"예고 졸업 뒤 바로 해외공연예술단에서 활동하게 됐다. 수출 확대를 위해 문화를 매개로 삼던 때였다. 정말 많이 다녔다. 90년대 초반에는 서울예술단 조감독으로 활동했다. 외국의 유명 재즈피아니스트나 색소폰 연주자는 물론 타악의 본고장인 일본 사또가시마에 자리잡은 예술단 `고도`와 협연을 했던 게 기억난다. 타악창작 작업을 하는 팀이나 그룹과도 많은 공연을 했다. `우리 것은 소중하고, 보존해야 하며 바르게 전승해야 한다`는 믿음을 갖게 된 계기다. 또 우리 춤도 세계적인 작품을 만들려면 공동작업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융·복합이라고나 할까. 미국 버지니아 타투(군악페스티벌)와 캐나다 퀘벡 공연 때 1만 명이 넘는 관객으로부터 기립 박수를 받았던 게 생생하다."

-창작무로도 잘 알려져 있다. 안무 때 무슨 영감 같은 게 있나.

"우리 설화와 굿 음악을 바탕으로 가장 한국적인 토속민속춤과 음악을 연구한다. 한국 춤은 전통이 토대가 돼야 하고, 그러려면 음악이 정말 중요하다. 음악에 따라 작품의 색깔이 완전히 달라진다. 예술은 자유롭지만 엄격하기도 하다. 세종대왕이 간파했듯 무대를 지켜보는 대중의 눈이 정확하기 때문이다. 작두를 타는 무녀의 발끝과 같이 집중하고 또 집중하는 것 이외에 무엇이 더 있겠나."

-가장 기억이 남는 작품을 하나만 꼽는다면.

"남사당놀이를 소재로 한 창작무 `사당각시`다. 부평초처럼 고난과 핍박의 세월을 떠돌면서도 처절한 예술혼으로 전통연회의 그루터기를 지켜온 남사당패의 여정을 극적인 무용으로 펼쳐내고자 했다. 법고창신의 전통연희를 바탕으로 창작한 꼭두각시놀음, 어름, 덧뵈기, 풍물, 버나, 살판의 여섯 실타래로 어우러진 작품이다. 남사당의 운명은 모든 예인들의 숙명과도 같은 것 아니겠나. 고해를 끝없이 헤엄쳐야 하는…"

-채향순중앙무용단을 이끌고 있다. 지향점은 무언가.

"사실 출발은 소박했다. 모든 예술전공 대학생들이 그렇듯 진로가 불투명하다. 대학을 졸업한 뒤 전문 무용단으로 가는 다리가 필요했다. 무용을 중단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이제 그런 가교역을 넘어 대중적 공감을 얻는 무대를 만드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후배들에게 무용가로서의 자세랄까, 마음가짐을 들려 준다면.

"기본 정신과 겸손함을 잃지 말고 끊임없는 노력으로 정진하라고 말하고 싶다. 특히 음악의 중요성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서양음악도 좋고, 국악도 좋지만 음악을 모르면 제대로 된 무용이 나올 수 없다."

-한류가 K팝이나 드라마에 치중된 감이 없지 않다. 전통문화를 한류화할 방안은 없겠나.

"글로벌 시대에 자국의 고유문화가 국경을 넘어 타국으로 전파되는 경향,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나타난 신조어가 바로 한류 아니겠나. 최근에는 대중문화를 넘어 김치나 가전제품 등으로 선호 현상이 확산되고 있다. 음악으로 좁혀보면 한류의 DNA는 우리 국악에 기반한 것이다. 한국인의 장점인 창의성과 끼를 발휘해 우리의 독창적 예술성이 가미된 새로운 콘텐츠를 개발해야 하는 게 과제라고 본다."

-박근혜 정부는 국정 4대 지표로 문화융성을 내세우고 있다. 현장에선 어떻게 느끼나.

"문화융성 정책에 힘 입어 주변 예술가들의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모두가 함께 가도록 다양한 장르에 지원해 주셨으면 한다."

-무용 등 전통문화 진흥을 위한 지원 방안으로는 무엇을 들겠나.

"우리 전통문화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공존하는 불멸의 콘텐츠다. 다만, 유형적 문화유산에 치우친 나머지 무형적 유산은 상대적으로 도외시하는 게 현실이다. 다각적 지원을 원한다. 역사와 전통을 잊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

채 위원장은 뉴욕의 브로드웨이에서 수십 년 째 공연을 이어가는 뮤지컬 `캣츠`를 예로 들며 "우리도 대규모 전문공연장에서 다양한 작품을 정기적으로 무대에 올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국의 경극이나 일본의 가부키 이상의 전통을 갖고 있는 만큼 얼마든지 세계인의 이목을 사로잡을 수 있는 문화상품을 내놓을 수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고향에는 자주 가나. 또 계획이 있다면.

"당분간은 지속적으로 세종대왕전통예술경연대회를 통해 전통문화유산을 전승 발전시키는 데 주력할 생각이다. 지난 9월 대전에서 열린 전국무용제에서 `사당각시`를 개막 공연했다. 또 11월 3일 대전시무형문화재 제 20호 살풀이춤 김란 선생의 발표회 때 장고춤을 공연할 예정이다."

◇채향순 교수는

충남 공주가 고향으로 대전에서 자랐다. 선친은 사물놀이로 잘 알려진 김덕수 씨 아버지와 교유가 깊었다. 타고난 끼와 더불어 전통문화의 세례를 받으며 성장할 수 있었던 집안 분위기가 오늘날 그를 만드는 토대가 됐다. 김 씨와는 여전히 가족처럼 지낸다. 한국국악예술중·고(현 국립전통예술고)를 마치고 해외 공연을 하며 본격적 활동에 나선다. 중앙대 국악과를 졸업하고 중앙대(무용교육학)와 경희대(무용학)에서 석·박사를 취득했다.

제 12회 전주대사습놀이 무용부문 장원과 한국방송대상 개인상, KBS 국악대상 무용부문 대상 등 수상 이력을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다. 서울가무악예술단 예술감독과 전북 문화재위원, 백제예술대 전통공연예술과 교수, 한·중·일아시아가무단 예술감독을 역임했다. 대전시립무용단 상임안무자로도 활동했다.

중요무형문화재 승무와 살품이춤 이수자지만 춤뿐 아니라 판소리, 타악을 넘나드는 가무악에 전념해온 예인으로 더욱 유명하다. 그의 장고춤은 혼을 부르는 소리와 동작으로 관객을 휘어 잡는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채 위원장은 전통의 전승을 넘어 창작의 지평을 확장하는 데 주목해왔다. 우리의 전통춤과 옛 이야기에서 춤의 소재와 테마를 찾아 세계적인 작품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철학이다. 이렇게 탄생한 `사당각시`는 2013년 대한민국 무용대상 대통령상을 받았고, 현재 호평 속에 초청 공연이 이어지고 있다. 주요 안무작으로 `풍고춤`과 `물의 소리`춤-연신풍장, `만월`, `하늘다리`, `도리화`, `풍류가인` 등 다수.

최근 대전에 가는 일이 잦아졌다. 대전시무형문화재 제 20호 살풀이춤을 김란 선생에게 배우기 위해서다. 얼마 전 서울에 보존회 지부를 냈다. 채 위원장은 "김란류의 살풀이춤은 대전만의 문화재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특유의 색깔과 깊이가 그러려니와 전국 곳곳에서 추어질 때 비로소 가치를 높일 수 있다는 의미로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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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향순 한국전통예술위원장이  준비중인 `세종대왕전통예술경연대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빈운용 기자
채향순 한국전통예술위원장이 준비중인 `세종대왕전통예술경연대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빈운용 기자

송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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