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각각 급변하는 세계 정세 우리가 알지 못한 삶의 길 인도 이익·좌우 초월한 '현인' 절실

우리의 최대 명절 중 하나인 한가위가 지났다. 이번 추석은 쉬는 날이 길어 직장인에게는 즐거운 추석이었다. 명절에 스트레스로 불편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온 가족을 만나게 되어 기다려지는 즐거운 이도 있겠다. 필자는 대가족에서 유년기를 지냈다. 어릴 적 한가위와 설날 등은 온 친척이 한 곳에 모이는 중대한 행사였고 문중회의가 열렸다. 많은 문중의 친척들이 모여 여러 가지 토의를 했다. 어린 필자가 보기에는 대부분의 안건들에는 간단히 결론이 났지만, 간혹 쉽게 합의를 하지 못하는 복잡한 안건들도 있었다. 그러면 문중의 웃어른들께 안건에 대한 의견을 묻고 도움을 청했다. 어른들은 그 것에 대하여 역사적인 근거 및 경험 등을 앞세워 지혜로운 결정을 내렸다. 어린 필자야 딱딱한 회의가 속히 끝나기를 바랐지만, 회의는 그날 처리해야 할 것들이 끝나기 전엔 계속되었다. 그중 흰 도포를 입고 하얀 수염을 길게 늘어뜨려 흡사 도사나 산신령 같은 풍모의 어르신이 계셨다. 어린 필자에겐 이승의 사람이 아닌듯해 두려움마저 느껴졌다. 모든 안건은 문중의 그 어른이 결론이 났음을 알려야 끝났다. 그간 서로 다른 의견으로 날카롭게 충돌하던 이들도 그의 한마디로 모든 것을 인정하고 수긍했다. 그 흰 도포에 흰 수염의 어른에게서는 범접할 수 없는 위엄과 절묘한 균형 감각이 있었고, 다른 이들이 반론을 거의 제기하지 못했다. 문중에 대한 사랑과 지식, 현명함, 풍부한 경험, 인자함, 무욕의 달관으로 무장된 듯 했다. 문중의 일 뿐만이 아니라 가족문제 사회문제도 의견을 묻고 도움을 청했다. 그 어른은 육체적으로는 쇠약해 보였으나 꼿꼿한 자세와 형형한 눈빛에 인자한 음성으로 사랑과 지혜를 더해 결론을 도출하였다. 또한 날카로운 지적과 나무람이 있었지만 부드럽고 따뜻하며 정감 넘치는 인자함이 있었다. 곁에만 있어도 따뜻한 정을 느낄 수 있었던 문중의 어른이었다. 이 어른이 계신 것만으로도 모든 친척들에게 든든한 힘이 되었고 문중의 정신적 지주였다. 요즘 세상에서는 이런 어른을 찾기 쉽지 않다. 디지털화 되어 찰나에 결론을 도출하여야하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금년 봄에 인공지능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대전이 있었다. 인간과 컴퓨터 당대 최고수간의 흥미로운 대결이었다. 대결 전에는 모두 인간 이세돌의 완승을 예측했었다. 하지만 예상을 비웃듯 알파고는 막강한 전력으로 이세돌 선수를 보란 듯이 제압했다. 이 세기의 대결 이후에 인간들은 큰 충격을 받았고 디지털 인공지능에 대한 공포감도 적잖이 드러냈다. 하지만 인공지능의 인간을 능가하는 능력에 경이로움과 미래의 희망을 보기도 했다. 인공지능에 대한 부정적 시각도 있지만, 인간 최고수를 몰아세우고 승리하자 인공지능에 대한 무한한 가능성으로 인간의 삶에 많은 도움을 주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쨌든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이벤트였고, 한편으로는 `인공지능이 인간세상의 길라잡이가 될 수 있지 않는가?` 하는 막연한 기대감도 갖게 된 건 부인할 수 없다.

최근 우리나라와 주변강대국 간의 정세가 매우 복잡 미묘하다. 시시각각으로 격변하는 글로벌 세상에서 순간의 방심은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요즘 같은 복잡하고 어지러운 정세의 대한민국의 갈 길을 인도해주는 길라잡이가 되어줄 이가 절실하다. 알파고와 같은 정밀한 인공지능이 이를 해결해 주었으면 하는 기대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인공지능이 아무리 빠르고 정확한 판단을 할지라도 인간의 정서까지도 대신하긴 어렵다. 아직까지는 인공지능이 그 어른에게서 느껴지던 위엄, 사랑, 헌신의 자태마저도 대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지 못한 것을 깨닫게 해주는 현인이 절실하다. 각 분야에 개인적 이익에 치우치지 않고 좌우에 편향되지 않는 시대의 어른이 계셨으면 좋겠다. 나라가 어려울 때 지도자들이 찾아가 도움을 청하고 용기를 얻을 수 있는 우리시대의 어른은 어디에 있는가?

강명식 푸른요양병원장·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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