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엔 병원 규모 중요하지 않아 마음 편히 쉴수 있는 곳이 최고 배려·경험 풍부한 시설 확충을

장면 하나. 말기암을 진단받은 환자는 첫 만남에서 `실험적 항암치료도 다 번거롭다, 조용히 책도 읽고 신문도 보면서 인생을 돌아보고 싶다.` `단 열흘, 아니 일주일만이라도 가족을 떠나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장소를 알아봐 달라`고 하셨다. 무척 고단해보였다. `나보다 당신을 더 잘 보살 펴 줄 곳이 어디냐`는 부인을 설득하여 가족 방문이 자유롭고 평이 좋은 호스피스병동에 입원하기로 하였다. 찡그린 환자분의 표정도 조금 나아보였다. 그러나 그날 저녁 자녀분들이 펄쩍 뛰며 반대했다. `어떻게 아버지를 그런 말도 안 되는 곳(아주 작은 규모의 병원이다)에 모실 수 있냐, 최고 병원에 모시겠다.`고 했다. 방문은 중단되었고, 환자분은 희망하신 호스피스병원 대신 유명한 대학병원의 종양내과병동에 입원하셨다.

`존엄` 혹은 `존중`이라는 말에 쉽게 `좋은 옷과 맛난 음식, 편안한 잠자리` 혹은 `최첨단 현대식 병원`이나 `최고 수준의 의료진`을 떠올리는 우리가 애달픈 가족을 위하여 자주 내리는 결정이다. 그러나 나의 마지막이어도 그럴까? 우리는 정말 `병원의 규모와 명성`을 선택하는 것으로 나의 존엄도 지켜낼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일까? 한 끼 굶는 것보다 마음 다치는 일이 더 무섭고, 때로 찰나의 의미가 며칠간의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무게를 지닐 수 있다고 믿는 내게는 아무래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들이 더 중요하게 느껴지는데….

흥미로운 연구가 있다. 돌봄 제공자들이 생애말기의 존엄성 유지와 관련이 있다고 판단한 10가지 요인에 대하여 지역사회 거주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부터 우선순위를 선택하도록 했다. 결과는 `자기 존중` `타인의 존중` `선택 능력과 독립성 유지`와 같은 요인들이 1, 2, 3위를 차지한 반면에 `신체적 요구 충족`과 `정서적 요구 충족`은 각각 10위, 9위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가 사랑하는 이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대신한 선택들이 어쩌면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무례나 폭력이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진정 존엄한 시간을 지켜드리고 싶다면 무언가 `대신 해 드리기`보다 다만 `귀 기울이는` 자세가 필요한 것 아닐까?

장면 둘. 그녀는 내가 아는 최고의 간호사다. 교과서에나 존재하는 줄 알았던 간호를 몸으로 보여준 사람. 좋은 간호사로 살고자 하는 방황과 고민도 깊어 대학병원 뿐 아니라 여러 중소병원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고, 해외에서 받은 학위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경력도 있다. 결국 병상수가 20개도 안 되는 지방도시의 호스피스전문기관에 정착했다. 최고 수준의 말기 돌봄을 자랑하는 곳으로 직원들의 자부심도 높고, 호스피스완화의료의 모범사례로 여겨져 직원들은 여러 곳에 강의를 다니기도 한다. 그 간호사의 자부심은 `산부인과 간호사가 생명을 받아낸다면 호스피스 간호사는 영혼을 받아내는 산파`라는 말에서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정말 보잘것없이 작은 규모`의 병원에서 일하기 때문에 처음 만난 사람들은 너무도 쉽게 그녀를 무시한다. 얼마나 공부를 못했으면 이런 병원에서 근무 하냐는 막말을 들은 적도 있다고 했다. 오래 겪어본 후 기껏 칭찬이라고 하는 말이 또 큰 병원, 대학병원 근무를 권하는 것이라며 씁쓸해 한다.

그녀가 새삼 이런 말들에 흔들리지는 않겠지만, 좋은 뜻을 품었던 젊은 간호사들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보다 규모가 큰 병원으로 떠나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내게는 이런 말들이 모두 내 미래를 향해 찔러대는 칼날 같다. 20~30년 후면 나도 도움이 많이 필요한 노인 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고, 그 때 내 안위는 멀리 있는 대학병원 보다 집 근처의 작은 재활병원 혹은 완화의료기관의 수준에 더 큰 영향을 받을 것 같기 때문이다.

하여 먼 국가정책 대신 가까운 이들의 실천에 기대어 내 미래로부터 위탁받은 과제를 풀어보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지역에 장비와 시설, 병원의 규모 대신 사려 깊은 눈과 경험, 충분한 시간을 가진 사람들로 승부하는 작은 병원들을 세우는 일.

김형숙 순천향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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