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오디세이] "흙수저·금수저… 양극화 해소 해법은 동반성장"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전 국무총리)이 동반성장에 대해 말하고 있다.  빈운용 기자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전 국무총리)이 동반성장에 대해 말하고 있다. 빈운용 기자
스코필드 박사와 동반성장, 그리고 양극화 해소라는 시대정신은 절묘하게 맞물려 있다. 그 고리 한 가운데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전 국무총리)이 있다. 정 이사장은 스코필드 박사로부터 나눔과 배려의 정신을 배워 DNA화 했고, 동반성장은 오늘날 국가적 어젠다인 양극화 해소의 해법으로 주목받는다. 얼핏 공정경제 또는 경제민주화와 궤를 같이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동반성장은 보다 넓은 개념이라는 게 정 이사장의 설명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은 물론 부자와 빈자, 고용자와 노동자, 서울과 지방, 남성과 여성, 도시와 농촌, 남과 북, 국가와 국가간에 이르기까지 서로 손잡고 파이를 키우며, 함께 키운 파이를 공정하게 나누자는 게 동반성장이라는 설명이다. 정치권의 러브 콜이 쏟아지는 것도 동반성장의 매력과 비전 때문일 것이다. 합리적인 개혁성향을 지닌 데다 충청 출신이라는 점도 가점이 아닐 수 없다. 정 이사장은 "무엇이 되느냐보다 무엇을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며 "동반성장을 이루기 위해 어떤 일이든 할 각오가 돼 있다"고 밝혔다.

◇대담=송신용 서울지사장

-먼저 스코필드 박사 얘기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박사는 3·1운동 민족대표 33인에 더해 제 34인으로 불린 영국 태생의 캐나다인이다. 한국에 두 번 체류 했는 데 우리나라의 독립(1916-20년)과 발전(1958-70년)에 헌신했다. 그 공로로 외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됐다. 석호필(石虎弼)이라는 한국 이름까지 지었다. 별명이 호랑이였다. 한국에 대한 애정이 지극했고, 죽음을 맞을 때까지 한결 같았다."

-호랑이 스코필드 방한 100년 기념위원장을 맡고 있는 데.

"1958년 광복 10주년 때 건국훈장을 받으러 두번째 내한했다가 아예 눌러 앉았다. 세계적 세균학자로 서울대 수의대 교수로 재임하면서 이번에는 부정부패 추방에 앞장 섰다. 한편으로는 장학과 보육 사업을 활발하게 펼쳤다. 지난해부터 사업을 본격화했다. 20번 가까이 전국을 돌며 강연을 했나. 대전에서는 오정호 목사님이 계신 새로남 교회에 다녀왔다. 미 LA에서 열린 한인세계선교대회에서 캠페인을 했고, 유품전시회를 열 계획이다. 또 뮤지컬을 제작 중이다."

-1기 장학생으로 34명을 선발한 건 `34번째 민족대표`라는 의미를 담은 건가.

"그렇다. 이제 시작했으니 내년에는 68명으로 늘려나갈 생각이다. 국내와 캐나다, 미국, 동유럽,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석호필 할아버지의 뜻을 기려 미래 지도자들을 발굴하고 키우려고 한다."

-개인적 인연을 들려 달라.

"집안이 어려워 중학교 진학은 생각도 못한 채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는 데 친구 아버지인 이영소 서울대 교수 부부가 집으로 찾아 오셨다. 입학만 하면 장학금을 준다길래 경기중 시험을 쳐 합격했다. 이 때 스코필드 박사와 연결돼 지원을 받게 됐다. 등록금과 생활비에 그치지 않고 나의 정신적 지주로서 가치관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줬다. 아버지를 잃은 내겐 친아버지나 다름 없었다. 사슴처럼 선한 얼굴로 `운-찬-`이라고 부르곤 했다. 익살스러웠지만 성경 수업에 늦어 무슨 이유를 댈라치면 `핑계대지 마시오`라고 호통쳤다. 돌이켜보니 백발이 성성한 70대 할아버지와 열세 살배기 꼬마의 만남이었지만 언제나 나를 성숙한 인격체로 대했다."

-배운 게 그렇게 많았나.

"평소 `국제법은 없다`고 하셨다. `세상을 움직이는 건 국력`이라며 `국력을 길러야 한다`고 역설했다. `약자에게는 비둘기 같은 자애로움으로, 강자에게는 호랑이 같은 엄격함으로` 대할 것을 강조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좀 먹고 살만 해진 뒤에는 `한국의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없다`는 말씀을 하시곤 했는 데 `눈곱만치도`라는 표현을 빼놓지 않았다. 어려운 사람들을 사회 공동체가 보살펴야 한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했다. 그런 이유로 대학을 진학 할 때 상과대를 권유해 결국 경제학과로 갔다. 내가 동반성장 문화 조성과 확산을 위해 뛰는 건 선생님의 가르침 때문이다."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으로서 근황이 궁금하다.

"국무총리로 있을 때 계기가 있었다. 어느 중견기업인이 찾아와 `이민 가야겠다`고 하더라. 납품가 후려치기 같은 대기업 횡포를 더는 견디기 어렵다는 하소연이었다. 그래서 이명박 대통령에게 `양극화가 너무 심해져 경제가 활력을 잃고, 양극화 속 경기 침체는 사회 불안을 일으키는 만큼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씀 드렸다. 2010년 민간자율합의기구 형태로 설립된 게 좀 아쉽다. 뭐, 지금도 열심히 하고 있다. 대충 따져보니 강연을 200여 차례 다녔고, 세미나도 열고, 나름대로 성과가 있었다고 자부한다."

-흙수저, 금수저라는 말에서 보듯 양극화가 갈수록 심각하다. 해법이 없겠나.

"동반성장은 한마디로 `더불어 성장하고 함께 나누어 다 같이 잘사는 것`이다. 영어로 Let`s go together, We go together 쯤 될까. 그런데 함께 나누자면 부르르 떠는 사람이 많다. 부자 것 빼앗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자는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서로 힘을 합쳐 전체 파이를 먼저 키우고 분배의 룰을 공정하게 바꿔 다 같이 잘사는 사회를 만들자는 게 근본 취지다. 대기업의 지배구조를 투명하게 만들고 과도한 경제력 집중을 억제할 필요가 있다. 또 중소기업·비정규직·노동자·영세자영업자 등 경제적 약자에 대한 배려와 적극적 지원이 있어야 한다. 초과이익공유제 도입 등으로 불공정한 게임의 룰을 없애야 가능하다."

-정치권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 탓이 크다는 비판이 나온다. 정치권의 영입 제의가 끊임없는 데.

"하하, 김대중 전 대통령도 `사람이 어떤 자리에 있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일을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하지 않았나. 필생의 과업인 동반성장을 실현하려면 국회에 들어가는 게 효율적일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에서 합류를 권유해 잠시 고심한 적이 있었음을 부인하지 않겠다."

정 이사장이 정치와 선을 긋고 있음에도 최근 국민의당 박지원 비대위원장은 "안철수 전 대표 혼자로는 당내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없다"며 정 이사장과의 경쟁 필요성을 제기했다. 제 3지대 창당 추진론자들도 정운찬 이름 석자를 빠트리지 않는다.

-충청대망론과 관련해서도 꾸준히 거론되는 데.

"충청도 출신이라 엄청 덕을 입고 살았다. 어려서 서울 빈민가에서 살 때도 `충청도 애라 뭔가 다르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충청의 사랑 받았고 충청인이라는 게 자랑스럽다. 충청대망론은 그동안 권력이 너무 한쪽에 쏠려 있었기에 중원인 충청에서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해 균형 있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한다. 어쩌다 제 이름이 나온다는 것만으로도 깊이 감사 드릴 일이다."

-프로야구 두산 팬인데 요즘도 야구장 가끔 가나.

"한화 이글스 응원 않는다고 뭐라는 분들이 계시다. 사실 두산(옛 OB)도 한 때 충청 연고 팀이었다. 대학 다닐 때 사장이 충청도 출신인 두산의 장학금을 받게 되면서 인연을 맺었는 데 쭉 이어져 온 거다. 이글스 파크에도 언젠가는 가겠지."

정 이사장은 어릴 적 동네 형들 사이에 끼여 중견수를 본 걸 계기로 `야구를 사랑하는 경제학자`가 됐다. 그의 말처럼 야구는 시간제 경기가 아니라 회를 거듭할수록 변화무쌍한 게 매력이다. 메이저 리그 전설인 요기 베라의 `끝날 때 까지 끝난 게 아니다`(It ain`t over till it`s over.)라는 명언이 이를 상징한다. 9회를 완투하고도 패전의 멍에를 뒤집어 쓰거나 공 1개로 승리투수가 되기도 하는 게 야구다. 야구로 비유하자면 한국 정치는 현재 19대 대선이라는 빅 게임을 앞두고 지각변동 중이다. 저성장과 양극화 같은 사회·경제적 문제와 극단으로 치달는 정치 상황이 투수 정운찬을 마운드로 불러낼 날이 다가오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정운찬 이사장은

6·25 전쟁이 터진 줄도 모르던 충남 공주 탄천의 산골에서 태어났다. 조상 대대로 600년을 살았지만 초등학교 때 서울로 이사했다.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어려운 집안이었고, 특히 아버지를 일찍 여읜 뒤에는 옥수수로 만든 떡과 죽으로 10년 가까이 연명했다. 도시락을 싸갈 형편이 안돼 점심 시간이면 교실을 빠져 나와 뒷동산에서 1시간씩 산보를 했다. 특이체질인지 약골이 되지 않고 체력단련이 돼 요즘도 살인적인 일정 소화가 어렵지 않다고 한다.

경기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잠시 한국은행에 근무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갔다.

마이애미대(경제학 석사)와 프린스턴대 대학원(경제학 박사)에서 수학했다. 컬럼비아대 교수로 강의와 연구를 하다가 1978년 말 귀국해 서울대 강단에 섰다. 하와이대 경제학과 초빙교수와 영국 런던정경대 객원교수, 독일 보쿰대 초빙교수를 지냈다. 서울대 제23대 총장과 제40대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도전받는 한국경제`, `경제학원론`, `한국경제 아직 늦지 않았다`, `야구예찬` 등 저서 다수. 미 유학 당시 4개 대학 리그를 만들어 운영했을 정도로 야구광이다.

평생의 은인이자 스승인 스코필드 박사로부터 정의와 배려, 정직의 중요성을 배웠다. 5공화국 때 서울대 시국선언을 주도한 용기는 여기에서 나왔다. 서울대 총장에 당선된 것도 후보토론회에서 가식 없는 태도와 답변으로 높은 점수를 받은 데 힘입었다.

정 이사장은 세종시와 관련해선 말을 아끼면서도 안타까움을 내비쳤다. 그러면서 헌법개정을 통해 수도를 완전히 옮기거나 원점을 재검토하는 방안이 있을 수 있다고 솔직하게 밝혔다. 세종시의 효율성 제고 방안을 구체화해 충청의 발전을 앞당기고, 나아가 국가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의미로 들렸다.

충청젊은이들을 향해선 자신의 성장기를 설명하며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도 용기를 잃지 않고 노력하면 이겨낼 수 있다"는 교과서적 답변을 내놨다. 공직이나 대기업에만 눈을 돌리지 말고, 차근 차근 계단 올라가듯 성취를 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는 당부다. 다만, 조금이라도 여력이 있다면 창업에 나설 것을 적극 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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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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