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지정 백제문화 발굴·복원 계기 삼길

트로이와 히타이트 문명 중심지를 방문할 때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적지로 지정된 백제유적지가 떠오른다. 수년 전 거닐었던 부소산 뒷산과 삼천궁녀가 떨어졌다는 낙화암을 되새기면서 나는 백제문화가 찬란했으리라는 믿음과 함께 그 진수를 찾고자 하는 갈망을 가지고 있다. 아직기가 일본에 문명을 전달하고 흑치상치가 백제를 부흥시키기 위하여 한걸음에 달려왔으며 백제 주도로 일본과 문화 교류 수준이 높았다고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해상 이동 수단이 매우 발전되었을 터이다. 그리스의 섬들과 소아시아 서해변의 교류가 긴밀하였던 가운데 트로이 전쟁에 이르기까지 해상 교류는 매우 긴밀히 이루어졌던 점에서 백제의 문명간 교류와도 유사하다. 백제의 찬란했던 문화가 당나라에 의하여 대부분 파괴되어 남은 흔적을 찾기가 어렵지만 그렇다고 하여 백제 문화에 대한 평가 역시 부족함은 우리의 소홀함이 아닌가 하는 점에 늘 아쉬움을 가지고 있었다.

오랜 역사를 가진 나라일수록 기록이 단절되거나 가늘게 이어오는 경우가 다수 있다. 특히 고대 이전의 역사는 전문가의 발품으로 발견된 유적과 유물의 파편이 희미하게나마 말해주며, 당시의 상황을 유추하게 해 줄 뿐이다. 역사적 사실은 물증에 따라 그 모습이 크게 드러난다. 새로이 발굴되는 물증이 그동안 묻혔던 사실을 말해 주며 따라서 시간이 지나더라도 새롭게 태어나기도 한다. 이러한 사실을 트로이와 히타이트 문명이 대변해 주고 있다.

청동기 시대의 트로이 문명은 기원전 12세기에 소멸하였으나 호머가 일리아드로 기록한 것은 기원전 8세기이어서 그사이 무려 400여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이러한 시간의 흐름으로 일리아드라는 것이 지어낸 이야기로 치부되기도 하였으나 만약 호머가 기록하지 않았으면 어떠했을까? 우리에 비추어도 마찬가지이다. 삼국이 멸망한 지 300-600년이 지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저술되다 보니 중요한 역사기록이 누락되고, 중국에 경도되었으며 떠도는 이야기를 기술하였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라도 저술되지 않았을 경우 우리 선조의 역사를 중국의 기록에서만 뒤적일 수 있을 뿐이고 조선조 역사기록과의 징검다리를 외국 서적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호머 이후 기록이 단절되어 트로이가 전설상의 도시라고 알려졌으나 독일인 슐레이만에 의하여 트로이의 대문명이 3000년 만에 빛을 보게 되었다. 1865년 발굴이 시작된 이후 10개의 다른 문명층이 형성되었던 사실이 확인되었는데 발굴된 물증을 통하여 트로이가 발전된 문화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트로이 문명이 호머의 기록으로 발견의 실마리를 찾았다면 히타이트 문명은 설형문자의 해독으로 빛을 보게 되었다. 로마의 유적지를 발굴하고자 하던 고고학자가 우연히 히타이트 유적지를 발견하였으나 수십 년간은 어떠한 문명인지도 알지 못하였다. 유적지에서 발견된 다수의 설형문자를 해독하여 히타이트 민족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고 이집트의 람세스 2세와 전쟁 후 맺은 인류최초의 카데쉬 평화·동맹조약도 파악하게 되었다. 히타이트가 이집트와 교류한 것은 그 중심지에서 피라미드 모양이나 스핑크스 형태가 발견된 것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지도를 펼쳐 히타이트 문명의 중심지 하튜사, 이집트-히타이트가 싸운 중동의 카데쉬 지역, 이집트 문명의 중심지인 알렉산드리아를 연결해 보면 얼마나 광범위한 지역을 히타이트 민족이 통치하고 교류하였는지를 추론하게 된다. 햐튜사에서 발굴된 도자기, 청동문물과 함께 최초의 철기 유물을 접하게 되면 히타이트 가 4000여 년 전에 벌써 제국이라고 할 정도로 발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철기를 생산하기 위하여 1000도 이상의 불에 금속을 녹여야 하는데 이를 위하여 그 기반시설이 같이 확충되어야 함을 감안할 때 높은 문명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더욱 관심을 끄는 것은 문명간 교류이다. 트로이가 미케네 중심의 그리스 민족과의 전투로 멸망되었고 히타이트가 발칸반도에서 건너온 유라시아 민족의 침입으로 소멸되었다고 하지만 히타이트·트로이·지중해 미노스 문명 등 인류의 3대 문명이 기원전 1200여년 거의 같은 시점에 소멸되었던 점은 의문이다. 이들 문명 간의 교류가 있었다는 증거가 될 유물도 나오고 있음에 비추어 동시에 무너졌다는 것은 전쟁이 아니라 커다란 전염병의 창궐이 원인이 아닌가 하는 추정도 나오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일부 터키 고고학자는 서양의 기록에 의존하기보다 히타이트 기록을 통하여 트로이를 찾으려는 연구를 하면서 당시 상황을 재조명하려는 노력도 하고 있다. 우리가 배웠던 역사기록이 매우 제한적이며 새로운 자료가 발굴될 경우 어느 때라도 바뀔 수 있기에 역사 앞에선 겸손할 수밖에 없다.

부여박물관을 둘러보았을 때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의 아름다움에 한동안 넋을 잃었는데 히타이트의 문화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청동상을 제작하기 위하여 상당한 정도의 문화와 기술이 뒷받침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감추어진 역사적 유물을 발굴하고 이를 통하여 당시의 시대상을 찾아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은 수세대에 걸쳐 트로이와 히타이트의 문화를 발굴하는 고고학자들을 만나면서 더욱 느끼게 된다. 백제지역의 유네스코 지정은 백제문화를 더욱 발굴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트로이·히타이트 문명의 발굴을 위하여 현재도 선진국의 많은 학자와 전문가가 참여하고 있다. 백제가 국내적으로 고구려·신라, 대외적으로 당·일본과의 교류를 통하여 찬란하게 꽃피운 문화는 트로이·히타이트에 견줄 만 하며 이를 발굴하고 복원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조윤수 주 터키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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