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교과서에 실린 정훈의 `노랑 장다리 밭에 나비 호호 날고, 초록 보리밭 골에 바람 흘러가고, 자운영 붉은 논둑에 목매기는 우는고.`라는 `춘일(春日)`이라는 시를 처음 보았을 때, 담당선생님께서 `공설운동장으로 가는 큰 길에서 대흥학교로 가는 길목, 건너편에 약방이 있는데, 이 시를 쓰신 분이 거기에 살고 계시다.` 라는 소리를 듣고 대전에서 시인을 볼 수 있다는 설레는 마음으로 그 앞을 지날 때마다 두리번거렸다.

3년 전 쯤, 교과서에 실렸던 바로 그 시(詩)가 대전시청 네거리에 내걸려 있는 모습을 보고, 내심 이젠 대전도 문학 사랑의 새로운 싹이 움트는구나 하면서 기뻐했다. 그런데 지난달, 시인이 살던 그 집이 헐렸다는 소식에 접하고 나니, 그럴 줄 뻔히 알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금을 기다린 어리석음을 자책할 뿐이다. 근래 들어서면서 대흥 1단지를 재개발하면서 대전에서 가장 오래된 주택인 `뾰족집`을 부셔 길 건너 골목으로 어색하게 옮겨놓은 개발 회사나, 국책은행인 산업은행 건물을 개인에게 매각해 놓고 박물관으로 꾸미기를 바라는 관청이나 무엇이 다를까.

1911년 논산 양촌에서 태어난 소정(素汀) 정 훈(1911-1992)은 1938년에는 동인지 `자오선`에 `6월공`이라는 작품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했다. 해방 후에는 대전으로 돌아와 `호서중학`을 세우는 한편, 박용래, 박희선 등 회원과 함께 `향토시가회`를 조직, 지역 문학 발전에 기여했다. 1951년에는 대전 문학에 중요한 기폭제 역할을 한 `호서문학회`의 창립하여, 국내 최장수 동인지를 발간했다. 그의 대표 시집은 1949년에 발표한 `머들령`이 있다. 1960년 이를 표상으로 `머들령 문학회`가 발족돼 시내 문학하는 학생들이 모여 공부했다. 서거 10주년이었던 2002년부터 `정훈 문학상`이 제정되었고, 금산으로 향하는 국도 상 터널이 `머들령` 이름을 사수하고 있다.

부셔버린 20여 평의 민가는 1930-40년대 지어진 안채는 부엌과 2개의 안방, 대청마루, 건넌방이 있는 ㄱ자 형태의 가옥으로 마당을 지키던 작약과 주목이 있었고, 큰길가에 거처하시던 사랑채 겸 약방에는 외부로 통하는 문이 있었다. 후에 제자들이 모임을 위한 방을 조적조로 골목 가에 지은 보잘 것 없는 집이었지만, 소박한 우리 마음의 고향이었다. 앞으로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을 기록하지 않으면 역사가 끊기고, 보고 있는 것을 보관하지 못하거나, 살아 있는 공간을 유지하지 못하면 역사는 기억 속으로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유병우 씨엔유건축사사무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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