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 김숨 지음·현대문학·288쪽·1만3000원

"군인들이 못을 한 300개 심은 나무판을 들고 막사 뒤에서 나왔다. 그들은 못판으로 석순 언니를 굴렸다. 발가벗겨진 석순 언니의 몸에 못들이 박혔다가 뽑히면서 생긴 구멍들에게서 피가 솟구쳤다. 그들은 석순 언니를 땅에 묻지 않고 변소에 버렸다. 그들은 죽은 소녀에게는 땅도 아깝고, 흙도 아깝다 했다." (`한명` 20-21p 중에서)

영화의 한 장면이 아니다.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된 우리나라 할머니들이 지난 1930년부터 1945년까지 낯선 땅에서 실제 당한 일이다.

올해 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아픔을 다룬 영화 `귀향`이 상영됐을 때 관객들은 슬픔과 분노에 치를 떨었다. 영화는 고통스런 장면이 나올 때 눈 한번 질끈 감으면 되지만, 책은 다르다.

글자와 머릿속 상상력이 더해지면 그 고통은 배가된다.

김숨 작가의 신작 소설 `한명`이 바로 그렇다. 책 한장 한장을 넘길 때마다 이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이 절로 든다. 하지만 작가는 오히려 인용 출처를 밝히며 이야기가 실제 증언한 내용임을 알린다.

소설은 강제 동원된 위안부 피해자 20만 명 중에 단 한명만이 남았다는 설정으로 시작한다. 80여 년 전 열세 살 소녀였던 주인공은 마을 강가에서 다슬기를 잡다 난데없이 나타난 사내들에게 잡혀 만주로 끌려간다. 그곳에서 다른 소녀들과 함께 일본군에 의해 육신을 난도당하는 성적 학대와 고문을 당한다. 생사를 넘나드는 참혹한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그녀는 아픈 기억을 짊어진 채 고향으로 되돌아오지만, 더 이상 그녀를 기다리는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소설은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 증언을 시작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238명의 위안부 피해자가 공식적으로 등록이 됐으며,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은 반세기동안 감춰져 있던 위안부 할머니들의 삶을 세상에 드러나게 한 촉매가 됐다. 그 뒤 전국의 위안부 생존자들이 침묵을 깨고 연달을 고백을 쏟아내면서 `위안부 문제`는 한일간의 청산할 쟁점으로 부상됐다.

허구가 아닌 아픈 역사적 사실인 만큼 작가에겐 쉽지 않은 작업이 됐을 터.

김숨 작가는 "언젠가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소설을 쓰고 싶었지만, 내 소설적 상상력이 피해자들이 겪은 일들을 왜곡하거나 과장할까봐, 피해자들의 인권에 손상을 입힐까봐 조심스럽고 또 조심스러웠다"며 "하지만 피해를 증언할 수 있는 할머니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을 시기가 올 것이므로, 소설을 통해 경각심을 가지게 하고 싶고, 그것이 문학의 도리라고 생각한다"며 집필 동기를 밝혔다.

집필 전 300여개에 이르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증언록을 구해 읽은 작가는 증언들을 재구성해 다큐멘터리에 가까울 정도로 치밀한 서사를 완성시켰다. 또 그동안 한국문학이 잘 다루지 않았던 `위안부` 문제를 본격적인 문학의 장으로 이끌어냈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

작가는 이 이야기를 통해 역사가 지워버린 과거를 복원해내며 다시는 반복돼서도, 잊혀서도 안될 기억의 역사를 강조한다. 세월이 흘러 위안부 피해자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 때 작가는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이 소설을 읽는 당신이 그 한명이 되어주면 된다고…."

1997년 대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김 작가는 그동안 8편의 장편소설을 내며 이상문학상과 대산문학상, 현대문학상을 휩쓸며 평단과 독자로부터 고른 호평을 받아왔다. 여성, 노인, 입양아 등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계층을 집중적으로 탐구해온 작가는 인간 사회의 그림자와 분열의 조짐을 예리한 시선으로 천착해 매 작품마다 탄탄하고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선보여왔다. 원세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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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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