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의 재발견 19 현충사의 세가지 슬픔

고전(古典)으로 불리는 책들이 있다. 예전에 쓰인 작품으로, 시대를 뛰어넘어 변함없이 읽을 만한 가치를 지니는 책들을 일컫는다. 사전상 정의일 뿐이다. 실제는 누구나 얼추 알지만 직접 읽어 본 이는 드문 책들. 작가와 제목만 이름난 책들이다. 그런 고전은 책들 밖에도 존재한다. 둘러보면 지역사회에도 눈길과 손길을 애태우게 기다리는 고전들이 숱하다. 아산시 음봉면 고룡산로 12-38에 자리한 `현충사`(顯忠祠)도 그렇다.

현충사는 사계마다 첫 인상을 달리한다. 봄날의 현충사는 앞다투어 핀 꽃들이 장관이다. 가을 현충사는 형형색색의 단풍들이 마치 고운 조각보 같다. 겨울 눈 덮인 현충사는 경내를 휘감아 도는 칼바람과 함께 한 폭의 동양화이다. 여름은 소리로 압도한다. 입구를 지나자마자 양 켠 낙락장송에서 울어대는 온갖 여름 풀벌레들의 울음소리는 온 몸을 쩌렁쩌렁 파고 든다.

학교를 경험한 대한민국 국민들 가운데 사적 제155호 현충사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정신과 위업을 선양하기 위한 곳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리라. 초·중·고 시절 수학여행이나 현장체험 일환으로 현충사에 들렀을지도 모른다. 역대 박스 오피스 관객 수 1위로 2014년 1761만 명이 관람한 영화 `명량`을 통해서도 현충사는 전국민적 역사유적지로 각인됐다.

유명세만큼 우리는 현충사의 속살을 알고 있을까. 갔어도 눈 뜬 장님으로 둘러 본 것에 그치지 않았을까. 현충사는 1706년(숙종 32) 아산 지역 유생들이 조정에 청해 허락을 받아 세운 사당이다. 숙종은 1707년 현충사라는 현판을 내렸다. 현충사는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렸다. 일제강점기인 1931년 충무공 종가는 집안이 어려워져 충무공 묘소와 위토가 은행 경매로 넘어갈 위기에 처했다. 국민 성금으로 묘소와 위토를 되찾고 1932년 다시 현충사를 세웠다. 오늘날의 현충사는 박정희 전 대통령 재임 시절 모양새를 갖췄다. 박 전 대통령은 1966년부터 1974년까지 현충사성역화사업을 시행했다.

현충사 입구에서 출발해 충무문, 홍살문, 충의문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현충사 본전에 모셔진 충무공 이순신 표준영정과 마주한다. 표준영정이란 국가가 지정한 영정이다. 충무공 영정은 대한민국 표준영정 1호이다. 현충사 충무공 표준영정은 월전 장우성(1912-2005) 화백이 그렸다. 장우성 화백은 일제강점기 결전미술전에 `항마`로 입선한 이력 등으로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실렸다. 장우성 화백이 그린 또 다른 표준영정인 유관순 영정은 새로운 작가가 다시 그려 천안의 유관순 열사 사우 추모각에 봉안됐다. 현충사 표준영정은 지금도 참배객을 맞고 있다. 현충사의 `첫 번째 슬픔`이다.

현충사에는 충무공고택, 왜군과 싸우다 목숨을 잃은 충무공의 셋째 아들 이면의 묘소, 충무공이 기개를 다진 활터 등도 있다. 최근에 지은 시설로 충무공이순신기념관(2011년)도 있다. 이순신기념관에서는 충무공이 남긴 세계적 기록 유산인 난중일기, 임진장초, 충무공 서간첩을 볼 수 있다. 모두 국보 제76호이다. 진품은 수장고에 보관됐다. 이들 유물들과 어깨를 견줄 만한, 국보급에 버금가는 또 다른 기록 유산인 장계별책(충민공계초)를 현충사에서 볼 수 없는 것, 현충사의 `두 번째 슬픔`이다. 장계별책은 수백 년간 충무공 종가에서 보관했다가 분실 후 논란 속에 현재 국립해양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순신기념관에서는 거북선과 조선의 화포 등 임란 당시 조선 수군이나 왜군이 사용한 각종 무기, 한산대첩, 명량해전, 노량해전, 부산포해전 등 충무공이 이끈 주요 해전사의 기록과 상황도 한 눈에 볼 수 있다. 충무공 유물 가운데 보물 제326호인 `충무공 장검`은 당연 눈에 띈다. 충무공 장검은 충무공이 1594년 한산도 진중에 있을 때 만든 칼이다. 작가 김훈은 소설 `칼의 노래`에서 "몸이 칼에 포개져야만 베고 찌를 수가 있다. 배와 몸과 칼과 생선이 다르지 않다"고 썼다. 후대 사람은 붉은색 페인트로 충무공 장검을 분칠 했다. 진품의 분칠은 지웠지만 이순신기념관의 전시품은 분칠 된 그대로이다. 현충사의 `세 번째 슬픔`이다.

현충사 관람료는 무료이다. 하절기(3-10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문 연다. 동절기는 한 시간 일찍 문 닫는다. 매주 월요일 휴관이다. htt://hcs.cha.go.kr 윤평호 기자

◇이충무공, 여기 잠들다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다"(必死則生 必生則死). 충무공 이순신(1545-1598) 장군의 어록으로 유명한 글귀이다. 삶과 죽음을 한 몸으로 여긴 충무공을 만나러 왔다가 현충사만 들른 뒤 돌아가는 것은 반쪽 기행이다.

충무공은 무과에 합격해 여러 직책을 거쳤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에는 전라좌수사 직책을 맡았다. 충무공은 일본의 침입에 대비해 군사를 훈련시키고 거북선을 만들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해상 여러 곳에서 적을 무찌르며 역사에 남을 해전 승리를 기록했다. 충무공도 죽음은 피할 수 없었다. 충무공은 1598년(선조 31) 노량해전에 적의 총을 맞고 숨졌다.

충무공의 무덤은 아산군 금성산에 만들었다가 16년 후인 광해 6년(1614)에 지금의 자리(아산시 음봉면 고룡산로 12-38·사진)로 옮겼다. 무덤 주위에는 상석과 혼이 놀다 간다는 혼유석·향유석이 있다. 동자쌍, 망주석, 석상, 문인석 각 1쌍과 광명등 묘비석이 있다. 무덤 앞에는 정조 18년(1794)에 세워진 어제비와 비각이 있다. 1963년 일대가 사적 제112호로 지정됐다. 정식명칭은 2011년 7월 `이충무공묘`에서 `아산 이충무공묘`로 변경됐다. 아산 이충무공묘도 문화재청 현충사관리소에서 돌본다. 윤평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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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문 안쪽으로 현충사 본전이 보인다.  사진=현충사관리소 제공
충의문 안쪽으로 현충사 본전이 보인다. 사진=현충사관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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