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기념관, 올초 日개인연구가로부터 입수

 일제 무단통치의 원흉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 친필서한.  사진=독립기념관 제공
일제 무단통치의 원흉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 친필서한. 사진=독립기념관 제공
일제 무단통치의 원흉 아카시 헌병사령관 친필서한이 최초 공개된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는 광복 71주년을 맞아 12일 독립기념관 자료실에서 의병탄압과 무단통치의 주범인 일제의 이른바 한국주차헌병대사령관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의 친필서한을 공개한다. 공개할 아카시 친필 서한은 가로 11.17m, 세로 18㎝ 크기의 두루마리 형태로 배접된 장문의 일본 고어 초서체 문건으로 독립운동사연구소가 올해 초 일본 교토의 한 개인연구가로부터 입수했다. 이 서한은 1910년 경술국치 전후 한국민 강권탄압을 주도한 아카시의 무단통치 정책의 핵심 주장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 군국주의의 침략본질을 생생하게 알려주는 자료이다. 서한은 한일합방 직전인 1909년 8월 3일 아카시가 후임자로 임명된 사가키하라 쇼조에게 보낸 것으로, 자신이 2년간 재직한 경험을 바탕으로 '효과적인' 한국 지배를 위해 이른바 정책을 조언하는 내용이다.

의병 탄압을 마무리하고 식민통치 기반을 구축하려면 한국주차헌병이 조선반도의 치안권을 장악, 곧 헌병경찰제 시행이 마땅하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아카시는 서한에서 "불측한 백성을 제어하고 분쟁과 소요의 화근이라 할 수 있는 (중략) 이 새로운 보호국에서 군도의 광채와 다갈색을 싫어하여 보통의 경찰에게 의지하려고 하는 문관 기질은 배제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만약 헌병이 경찰의 전권을 장악할 수 없는 사정이 있다면 오히려 헌병은 일종의 식민지병이 되어 통감의 휘하를 벗어나야만 한다"며 "헌병대장이라는 명칭은 소생이 싫어하는데 이는 그 이름이 너무 작기 때문이다. 고로 한국주차헌병사령관이라는 명칭을 (중략) 소생은 희망하였습니다만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며 헌병의 권한 확대를 위해 '헌병대장(隊長)'의 직위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헌병대사령관'으로 직함을 승격할 필요성이 있다고 역설했다.

이 자료는 1910년 경술국치 전후 곧 1907년부터 1914년에 이르기까지 8년간 최선봉에 서서 한국민을 철저하게 탄압한 헌병대사령관 아카시의 무단통치, 헌병경찰제 주장 등을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독립운동연구소 측은 평했다.

아카시는 1907년 10월 한국주차헌병대장으로 부임해 왕산(旺山) 허위(許蔿) 의병장을 직접 신문하는 등 의병탄압에 앞장서고 이듬해 12월에는 일제 침략군인 이른바 한국주차군의 참모장을 겸직했다. 경술국치 직전인 1910년 6월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가 한국 통감으로 부임, 헌병대를 헌병대사령부로 확대 개편할 때 초대 헌병대사령관이 돼 무단통치의 기틀을 다졌고 1914년 4월까지 재임하며 한민족의 암흑기를 강요했다. 특히 그는 '기포성산(碁布星散)' 탄압방식으로 악명을 떨친 뒤 1918년 대만총독으로 부임한 뒤 이듬해 죽었다. 황진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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