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오디세이] "高부가가치 말산업, 농촌경제·레저 활성화 동력"

김옥선 전 의원이 정치 역정을 회고하며 말 특성화 고교 신설 계획을 설명하고 있다.
김옥선 전 의원이 정치 역정을 회고하며 말 특성화 고교 신설 계획을 설명하고 있다.
◇파란만장한 길을 걸어온 이 `남장(男裝)여인`의 얼굴에도 세월의 그림자가 조금씩 드리우고 있었다. 머리에는 서리가 내렸고, 주름이 엿보였다. 다소 야위긴 했는 데 단정하게 빗은 머리칼은 사진에서 본 젊은 시절 그대로 였다. `남장여인`, `정치 파동`의 이미지로 각인돼 있는 김옥선 전 의원(82)의 목소리는 나직하되 단호했다. 그는 3선 의원을 지낸 정치인이지만 사회사업가와 교육자, 종교지도자로서 1인 4역의 인생을 펼쳐왔다. 오랜 만에 언론에 모습을 드러낸 김 전 의원은 현실 정치와 반 걸음 떨어져 있으면서도 후배 정치인들에게 선공후사(先公後私)를 강조했다. 자신과 가정을 생각 하기 앞서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하라는 당부다. 교육사업가 답게 앞으로의 계획도 들려줬다. 충청권에 전무한 말(馬)산업 특성화 고등학교와 대학을 세워 인재를 육성하고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산업으로 키우고자 한다는 포부였다.

◇대담=송신용 서울지사장

-근황이 궁금하다.

"언론과 접촉한 지 한 5년이 됐나. 여기 저기서 인터뷰 하자는 데 응하지 않았다. 건강이 어디 활발히 나다닐만한 형편이 안되고. 허리를 좀 다쳐 치료받고 있다."

-현실 정치와는 완전히 손을 뗐나.

"정치권에서 소외된 건 아니고, 은퇴 선언을 한 것도 아니고… 멘토가 돼 달라는 후배들이 있고 가까이 지내는 정치인이 적지 않다. 뭐, 그런 정도다."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사회사업에 뛰어 들었다. 계기가 있나.

"기독교학교인 정신여고에 다니며 신앙이 깊어졌다.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는 데 졸업을 앞두고 민족과 여성 발전을 위해 한 몸 바치기로 결심했다. 6·25로 국토가 황폐화되고 곳곳에 아버지와 남편을 잃은 이들의 울음이 끊이지 않을 때였다. `과부와 고아를 불쌍히 여기라`는 성경 구절이 가슴을 파고 들어 열아홉살 때 에벤에셀 모자원을 세웠다. 1955년엔 학교법인 송죽학원을 설립했다. 정의여중과 정의여고를 세워 1만 2000여 명을 배출했다. 1961년에는 주민들의 간절한 요청으로 서해 낙도인 원산도에 원의중학교를 열었다. 어린 나이에 당차 보였는 지 당시 교육부 관료들이 `젊은 늙은이`이라고들 놀렸지."

-떠오르는 이미지가 `남장`과 `정치 파동이다`.

"`남장여인`이 뭐라고, 무슨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다. 1남 3녀 였는데 대학에 다니던 오빠가 학병으로 끌려가 어머니의 상심이 컸다. 어머니를 위해 오빠 역할을 대신하고 싶었다. 특별히 입을 옷이 있는 게 아니고, 흙-과 싸울 일이 많고 해서 군복을 물들여 아무렇게나 입었다. 강해 보이고 싶은 마음도 있었겠지. 그러다가 정치에 입문하면서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멨다.

정치 파동은 1975년 10월 8일의 일이지. 국회 본회의에서 8분 동안 발언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 독재자라고 비판을 퍼부었다. 그렇게 되니까 공화당과 유정회가 바로 합동 총회를 열어 제명 수순을 밟았어. 결국 10년 동안 공민권이 박탈됐던 거다."

징계안은 정일권 국회의장 직권으로 법제사법위원회에 회부됐고, 야당 반대 속에 여당 단독 처리됐다. 김 전 의원은 국회를 떠나야 했다. 국회 속기론엔 유신 비판 발언이 빠져 있다. 김 전 의원은 1984년 정치해금이 됐고, 그해 12대 총선(부여·보령·서천)에서 당선돼 3선 의원으로 명예를 회복한다.

-지난 해 속기록 복원을 국회의장에 청원했는 데.

"파동 40주년을 앞두고 정의화 국회의장에게 청원서를 냈다. 보상을 원하는 게 아니다. 사초(史草·역사 서술의 바탕이 되는 자료)를 바로잡기 위해서다. 민주화된 대한민국에서 유신 체제를 비판한 발언을 40년이 지나도록 복원하지 않는 건 여야를 떠나 후배들이 민주화에 대한 철학과 신념이 없어서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런데 아직 답이 없네."

-정치를 하면서 `투사`로 살았던 이유는 무언가.

"스물여섯에 정계에 투신했다. 제 5대 국회의원 선거에선 투표함 소각사건과 관련해 누명을 쓰고 140일 간 옥고를 치렀다. 엉터리 같은 일들이 난무하던 시절이었다. 부정과 불의를 보고 참을 수 있겠나. 정치인이 그까짓 한번 죽지, 두 번 죽나."

-자연인 김옥선으로서 앞으로의 관심과 계획은.

"농어촌과 도서벽지에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학교 3개를 개교해 인재를 양성했지만 모두 폐교 됐다. 학생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 말 특성화 고교와 말 대학 설립을 추진 중이다. 말 산업은 성장잠재력과 부가가치가 대단히 높은 산업이다. 하지만 인프라가 부족하고 전문 인력이 태부족이다. 말의 생산과 조련, 마술 경기, 경마, 승마 교관 및 보급, 거래, 재활치료 활용은 미래의 3차, 4차 산업이다. 농업 개방에 대응할 수 있고, 인구 감소로 어려움에 빠진 농촌을 살리는 길이기도 하다. 또 레저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높지 않은가. 신산업을 이끌 전문 인력을 키우고자 한다."

김 전 의원의 구상이 결실을 맺으면 충청권에선 처음이다. 난관이 없을 리 없건 만 김 전 의원의 의지는 강력해 보였다. 두툼한 서류를 보여주며 행정절차가 늦어지는 데 대해 아쉬움을 감추지 않았다. 함께 자리한 이공순 송죽학원 이사장은 동문들과 지역주민들도 측면 지원에 나서고 있다고 소개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들려달라.

"원산도는 세종 때부터 관개 마을터를 중심으로 병조(오늘날의 국방부)가 운영하던 말 목장이 있었다. `세종실록`에는 제주도에서 생산된 큰 암말 50마리와 수말 6마리를 방목해 번식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지리지`에는 목장 둘레가 40리(16Km) 였다고 한다. 물과 풀이 넉넉했기 때문이다. 서천에는 마량리(馬梁里)라는 지명도 있다. 말 특성화고 예정지는 중부 서해 관문에 위치해 있다. 교지가 동산을 끼고 있어 아름답기 그지 없다. 6만1000㎡(1만5000평) 부지에 건평이 515㎡(1700평)이다. 또 현대식 건물과 실습 승마장 부지를 확보했다. 말산업 지도자와 마필 전문가 육성에 최적의 장소다."

-귀츨라프 선교사 선양사업을 병행하고 있는 데.

"런던선교회 소속으로 1832년 7월 한국개신교 선교사론 처음으로 한국에 온 인물이다. 원산도에 머물면서 한손에 감자와 다른 한 손에 한문 성경을 들고 복음을 전하며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했다. 귀츨라프 한국선교 150주년을 맞은 지난 1982년 내가 주관해 기념탑을 건립한 건 하나님의 큰 은혜였다. 귀츨라프는 원산도를 떠나며 `확신을 가지고 보다 훌륭한 여명의 날이 한국에 빨리 이르기를 바람`이라는 글을 남겼다. 역사적 진실을 밝히고 복음을 전하는 기념 사업을 전개할 계획이다."

-정치권에서 개헌 불씨를 지피고 있다. 이에 대한 견해는.

"개헌은 국민을 위한 것이다. 국민에게 유리하게 해야지. 특정 정당, 정파를 위한 개헌이 돼선 안 된다."

-후배 정치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가사(家事)불구`, `처자(妻子)불구`다. 집안 일과 집 사람을 생각하려면 정치를 해선 안된다. 가정이 곧 국가요, 처자가 곧 국민이다. 애국심과 국민 사랑이 없거든 정치 하지 마라."

-정치와 거리를 두고 있지만 정치와 단절될 수는 없지 않나. 최근 충청대망론이 관심인데.

"영호남 독식 구조를 깰 수 있는 건 충청 뿐이다. 대망론은 충청 인물이 큰 일을 한다는 건 데 그것만이 우선은 아니다. 충청 출신이면 더할 나위 없지만 인물이 특출한 애국자가 나온다면 (지역을 떠나) 그 사람이 (대통령을) 해야 하는 거다."

-충청인들에게 인사를 해달라.

"지난해 독도에 갔다가 충남에서 오신 분들을 만났다. 보령에서 온 어떤 분은 "왜 대통령 안 나오시느냐"고 하더라. (웃음) 일일이 악수하고 헤어졌다. 고마운 게 너무 많을 뿐이다."

◇김옥선 前의원은

충남 서천이 고향으로 제 7, 9, 12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한 바 있다. 1975년 박정희 대통령을 `딕데이터(Dictator·독재자) 박`으로 지칭하며 강하게 비판해 정치 파동을 일으켰다. 대가는 혹독했지만 신민당은 이 사건을 계기로 반유신 투쟁의 수위를 놓고 선명성 논쟁을 벌일 만큼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5공화국 때는 5·18광주민주화 항쟁을 처음으로 거론하며 전두환 대통령을 향해 `나라를 빼앗은 도둑`이라고 독설을 쏟아냈다. `믿음의 정치, `사랑의 정치` 실현에 힘썼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다는 게 김 전 의원의 회고다. 서슬 퍼런 독재 시절에 남성 정치인도 해내지 못한 일을 도맡아 했다. 지난 대선에선 "그 중 제일 낫더라"는 이유로 박근혜 대통령을 음양으로 지원했다. 역사의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다.

어린 옥선은 어려서부터 여자 아이 같지 않았다고 한다. 담대한 성품에 항상 당당하게 행동했고, 웅변을 잘 했다. 몇 차례 월반을 할 정도로 실력이 좋았다. 도량 넓고, 사려 깊은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학생시절인 1946년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앞장섰다. 대학을 졸업한 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봉사의 헌신을 길을 택했다. 무소유(無所有)가 철학이다. 중앙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정치학 박사과정과 연세대 경영대학원 등을 수료했다. 야인시절 도쿄대 객원연구원을 지냈다. 신민당 정무위원과 당기위원장, 신한민주당 선전분과위원장과 부총재, 대한민국 헌정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빛과 소금의 삶, 김마리아 전기`, `역사의 교훈`(자와알렌 네루·번역), `마오쩌둥(毛澤東) 정치사상연구`(논문) 등 다수. 일본문화진흥회 훈장과 황희문화예술상(청렴결백 부문), 링컨기념 세계평화재단의 세계평화십자훈장을 받았다. 김 전 의원은 1950년대 자신이 세운 모자원과 학교를 돌아볼 때면 말을 이용하곤 했다고 한다. 60년이 흐른 현재는 말 산업 육성을 위한 교육기관 설립에 집념과 열정을 쏟아 붓고 있다. `알파 걸`의 원조 격인 그는 말을 타고 교정을 달릴 날을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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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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