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삶의 목적 깨닫게 해줘 더 넓은 안목으로 세상 보길

평생 종교를 갖지 않았던 삼성 이병철 회장이 1987년 타계하기 직전 가깝게 지내던 신부에게 남긴 인생에 관한 `절실한 질문 24가지`가 있다.

그 질문은 `잊혀진 질문(차동엽 신부 지음·명진출판사)`이라는 책으로 탄생했다. 그 질문은 사실상 고달픈 인생들의 흉금을 대변하는 물음들이다. 뭐랄까, 생의 밑바닥을 흐르는 거부할 수 없는 물음들. 그것들은 실상 절망 앞에 선 `너`의 물음이고, 허무의 늪에 빠진 `나`의 물음이며, 고통으로 신음하는 `우리`의 물음이다. 생의 밑바닥을 흐르는 거부할 수 없는 물음들이다.

"`한 번 태어난 인생, 왜 이렇게 힘들고 아프고 고통스러워야 하나`. `우리는 왜 자기 인생에 쉽게 만족하지 못할까`. `악인의 길과 선인의 길은 미리 정해져 있나`" 등 인생에 대한 근본적 물음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며 생활할까를 생각하게 한다.

차동엽 신부는 모두가 살기 어렵고 희망이 없다고 아우성인 이 시대의 독자들에게 살아가야 하는 분명한 이유를 제시하고, 우리들이 처한 `삶의 자리`에서 인생의 참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해법을 다양한 사례를 통해 들려준다. "사람을 살리는 일이란 사람들에게 살아갈 이유를 갖게 하는 것. 즉 희망을 갖게 하는 것이다"라는 큰 깨달음과 함께 이를 평생의 미션으로 삼게 만들어 준다.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준다. 음식점에 갔는데 종업원의 서비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사장 나오라고 해" 하고 항의하듯이, 우리는 살면서 문젯거리가 생길 때 하늘에 대고 삿대질을 한다. 이를 빗대어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고통으로 대표되는 한계 체험을 `최종적 포괄자를 위한 암호`라고 말했다. 어떠한 것이 되었든지 사람이 겪는 어려움은 `최종적 포괄자`인 조물주를 찾게 하는 구실이 된다는 것이다. 고통으로 말미암아 자신과 최종적 포괄자와의 상관관계를 짚어보면서 더 넓고 높은 안목으로 바라볼 수 있는 지혜를 갖게 해준다.

홀로 운전을 하거나 일을 하는 동안 또는 설거지나 청소를 하는 동안 그 침묵의 기회를 놓치지 말고, 자신의 내면과 대화를 시도해보는 기회를 자주 갖는 것이 좋다. 주어진 일, 습관이 시켜서 하는 일을 멈추고, 잠깐 나 자신에게 묻는 것이다. "`지금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너를 어떻게 대해줄까`. `너 참 사느라고 고달프지`"라는 등의 질문들을 던져보는 것이다.

이는 독백 같지만 엄연한 대화이다. 매너리즘에 빠진 내가 내면의 `나`와 나누는 소통인 것이다. 이 대화는 우리가 절친과 나누는 대화보다 훨씬 진솔하고 따뜻한 것이다. 침묵과 친해지기 위해서 가벼운 산책이나 여행으로 시야를 넓힐 수도 있다. 오직 나와 일대일로 대면하는 세상 속에 뛰어들면 새삼 진정한 나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천하의 나쁜 놈`들에게 벼락을 내리시지 않는 신은 신이 아니거나 아니면 없거나 한 것임에 틀림없다고 누군가 울분을 터뜨린다 해도 그 `의로운 분노`는 수용할 수밖에 없다. 고집스럽게 `성실의 법칙`에 따라 사는 노력파보다 교묘하게 `사기의 법칙`으로 사는 요령파가 더 잘사는 꼴을 봐주기란 정말로 분통 터지는 일이다. 만일 신이 있다면 왜 이런 어거지가 용납될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답은 "신은 벌을 주시는 분이 아니다. 적어도 현세에서는 말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흔히 신은 상선벌악(賞善罰惡)으로 인간의 행위에 보응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상선벌악의 시행은 궁극적으로 사후 또는 종말의 때에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현세에서 그 중간 평가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마지막 때로 유보되어 있을 뿐이다. 왜 그럴까, 그 죄인 또는 악한 사람에게 회개 또는 회심의 기회를 주기 위한 신의 자비가 그 이유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양심이라는 것이 있으니 언젠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마음을 고쳐먹기를 기다려주는 신의 자비가 바로 그 답답한 침묵의 이유다.

문희봉 시인·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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